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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의 크리스마스 휴일이군….”

  하이디 마리아 켈러가 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기대 이상’ 이라는 표현이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음은 굳이 추리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려던 손끝이 귀걸이에 걸리는 바람에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답잖게 차려입은 옷과 장신구는 우아한 기찻간의 인테리어와 잘 어울렸으나 결코 편안하지는 않아, 기차에 탑승한 이래 하이디 켈러에게 소소한 불편을 선사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짜증이 스쳤다.

  “한두 시간 내로 그칠 눈보라는 아닌 것 같다는데.” 한편 구두를 임시로 감싼 각반을 풀어내며 돌아온 리버 챈들러로 말하자면 평소에도 얼마든지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을 줄 아는 청년이지만, 유순한 눈가에 걸린 곤란함이란 언제고 표정 없는 제 동행에 비해 확연히 두드러진다.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잘 달려야 할 기차가 밤새 연이은 폭설로 멈추고, 다섯 시간 전까지 함께 카드놀이를 하던 옆 객실 승객이 칼에 찔린 시신으로 발견된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테다.  

  사립 탐정과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위는 환장스럽도록 쏟아지는 차창 밖의 눈보라에서 시선을 돌려 연회복 차림으로 사망한 남자를 내려다본다. 멋들어지게 걸친 흰 정장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강렬한 색채는 객실 내부의 암록색 카펫과 더불어 어쩐지 익숙한 배합이다. 하양, 빨강, 초록. 그리고 12월 25일의 새벽- 아마도 사건 발생 시각을 가리키며 멈춘 시계.

  정말로 기대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크리스마스 휴일이었다. 

 

***

 

 

  지난 가을 영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오스왈드 가 살인사건’은 금융-치정-살인 세 박자가 모두 엮인, 그야말로 상류 사회를 홀딱 뒤집어놓은 강력범죄였다. 그대로 한 가문의 명예를 진창에 처박을 뻔한 사건은 다소 극적으로 해결되었는데, 그 공이 어느 젊은 탐정과 형사에게 있음은 관계자라면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종종 자문 -’공식적’으로, 어디까지나 합법 선에서의- 을 주고 받는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우연히 이 사건에 함께 엮이게 되었고, 첫눈이 내리기 전에 범인을 잡아 재판대에 세우는 활약을 선보였다. 기록으로 정리하면 단행본 한 권 분량은 너끈히 묶어낼 공로담에 오스왈드 가족은 매우 감격했고 답례로 그들이 주관하는 프라이빗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을 덜컥 보내 줬다. 무려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발해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달리는 호화로운 사설 기차 파티다. 손 대기도 황송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용지에 적힌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집안의 체면을 보전해 준 귀하들의 활약에 감복하여 파티에 초대하니 부디 참석하시어 재미있는 얘기 좀 들려주기를 요망함.’

 

  독특하고 좋은 추억이 되겠거니 생각하며 기차에 올랐던 두 소시민은 쏟아지는 흥미와 관심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오스왈드 가의 노부인이 어찌나 발이 넓고 입이 가벼웠는지, ‘오스왈드 부인에게 들었는데’ 운운하며 사건에 대해 묻는 인사만으로 기찻간이 꽉 들어찼던 것이다. 챈들러 경위가 특유의 유연한 처세술로 수다쟁이들을 상대하는 사이, 말주변도 사람 사귈 의욕도 그다지 없던 탐정은 영혼 없는 단답이나 몇 번 주고받다 슬그머니 복도로 도망쳐버렸다. 호사가들의 유난한 관심에 홀로 시달리던 리버 챈들러가 마침내 친구를 찾아냈을 때 하이디 켈러는 식당칸 구석에 앉아 차창에 달라붙은 성에 개수나 무료하게 헤아리던 중이었다. 

  “파트너를 두고 혼자 사라지기야?” 리버 챈들러가 지그시 바라보자 하이디 켈러가 시선을 굴려 회피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은 건 피곤하다고…. 이제 슬슬 자러 가도 될 것 같은데.” “얼마 있지도 않았잖아? 그러지 말고-,” 리버가 잠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십 분만 더 버텨 보자. 아까 듣기로는 자정에 깜짝 이벤트가 있다던데.” 

  “이벤트는 무슨…. 금가루 뿌려진 샴페인이나 한 병 더 따는 거겠지.” 벌써 자정이나 됐느냐는 얼굴로 하이디가 길게 하품했다. 만사 귀찮아하는 여자와 굴하지 않고 이것저것 제안하는 남자의 흔한 대화 패턴이었다. 이런 논쟁의 양상이 으레 그러하듯, 이번에도 승리한 쪽은 리버 챈들러였다(덧붙여 두 번이나 친구를 버리는 건 하이디 켈러의 제법 가냘픈 양심에도 꽤나 켕기는 일이었다). 게으른 탐정은 얌전히 자리를 지키기로 했고 경위는 만족했다. 일종의 절충안으로, 둘은 소란의 한복판으로 돌아가는 대신 식당칸 구석에서 찾아낸 쿠키나 집어먹으며 묵은 수다를 떨었다. 지난 사건의 사후 뒷처리를 위해 이리저리 불려다니느라 두 사람 모두 바쁜 연말을 보냈다. 따지자면 이 기차 파티가 오랜만의 휴식이자 회동이었으니 나눌 말은 많았다. 어쨌든 이번의 여행이란 꽤나 드라마틱한 협업의 결과물 아니겠는가? 늦게나마 맞추어 볼 이야기란 끝이 없었다. “하이디, 러브콜은 정말 고맙지만 난 경찰로 전직한 지도 얼마 안 됐다고…?” “공무원은 겸직이 안 된다는 건 정말 아쉬운 일이야….”

  역시나 예의 ‘이벤트’란 어느 부유한 집안의 술 저장고에서 오래 묵어가던 최고급 포도주의 개봉이었으나 (“그것 봐….” 하이디 켈러가 코웃음쳤다), 마침맞게도 자정을 기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에드워디안 풍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객실 내에서 희게 물드는 바깥 구경을 하는 건 꽤 낭만적인 일이었다 (“남아 있길 잘했지?” 이번엔 리버 챈들러가 웃었다). 두 사람은 눈 구경을 하느라 자정을 훌쩍 넘어서까지 머물렀고, 귀한 술을 건네 준다는 핑계로 한 무리의 승객이 그들이 있던 식당칸을 습격했고, 몇 마디 담소가 오가다가 정신 차려 보니 뜬금없이 카드 판이 펼쳐졌다. 탐정과 경위는 사탕 한 봉지 값만큼의 돈이 오갈 무렵 물러나 구경꾼이 됐다. 곧 테이블 위를 오가는 판돈이 사탕 장수를 고용할 만큼의 금액으로 변했기에 꽤나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늘의 파티를 위해 맞춤 연미복을 구매했노라 자랑하던 남자가 그 고급 양복 값만큼의 판돈을 따갔다. “스미스 씨, 당신 퍽 운이 좋군!”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스미스라 불린 남자는 친근한 얼굴로 씩 웃더니 건배를 제안했다. 와인 잔이 치워지고 얼음 담긴 글라스가 한 잔씩 돌아갔다. 오스왈드 부인을 위하여, 이 멋진 기차를 위하여, 크리스마스를 위하여…. 쏟아지는 건배사들 속에서 하이디가 문득 리버를 봤다. 눈이 마주치면 어깨를 으쓱하며 잔이나 들어 보인다. “그으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메리 크리스마스, 리버.”  

  두 개의 잔이 가볍게 맞닿는 소리는 더 큰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렇게 퍽 유쾌한 새벽이 깊어 갔을 것이다. 아무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누군가 한 사람만큼은 분명 다른 마음을 품었을 크리스마스의 밤이….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을 맞이한 것은 밤새 내린 폭설로 어딘지도 모를 벌판에 정차한 기차와 어제의 판돈을 그대로 노잣돈 삼아 죽은 흰 양복의 남자- 미스터 스미스의 시체였다. 

***

 

  다섯 량으로 이루어진 기차는 가장 뒤의 두 칸을 침대차로 썼다. 시신은 그 중 B호차의 3번 객실 카펫 위에서 발견되었다. 최초 목격자는 B호차 객실을 이용하는 승객 열 명 전부였다. 

  개요란 이랬다. 대부분의 승객이 잠들었을 새벽녘, 예보보다 많이 쌓인 눈이 기어이 기차 운행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기관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느니 차라리 잠깐 멈춰 상황을 지켜보길 선택했고, 그 사이 갑작스레 닥친 눈보라에 정말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물론 기관사의 잘못이 아님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더하여 각 차량을 잇는 외부 통로에도 난간을 넘어 눈이 소복하게 쌓였기에 승객들은 졸지에 ‘고립 중 고립’ 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기관사와 차장이 일단 앞 칸들에서 A호차로 가는 길을 정리하던 와중, B호차에서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리버 챈들러였다. 몸에 배인 성실함 탓에 일찍 잠에서 깬 경위는 기차가 예정에 없이 정차 중임을 의아하게 여겼고, 문이 열리다 말 정도로 쌓인 눈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이 참….” 우선 되는 대로 문짝과 씨름하고 있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진 승객 한둘이 더 나왔다. 사람이 늘어나니 소란이 커져 늦잠을 자던 다른 이들까지 모조리 깨웠고, 결과적으로 객실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모두 초조하게 어슬렁거리게 됐다. 

  1번 객실과 3번 객실. 1번이야 노크를 스무 번은 해야 자리에서 일어날까 말까 하는 여자의 객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3번 객실의 스미스 씨는 어디로 갔는가? 리버가 1번 객실의 문을 집요하게 두드려 친구를 끌어내고, 앞 칸으로 가는 길을 정리하기 위해 자원자 몇과 떠난 뒤로도 3번 객실의 문은 한참이나 닫힌 그대로 고요했다. 별 기대 없이 문을 두드려보던 하이디가 문득 문고리를 툭 눌러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열려 있는데.” 무신경한 성격답게 그는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을 열었고 덕분에 피투성이로 물든 객실 바닥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어라, 안에 스미스 씨 계셨어요?” 미처 저지할 틈도 없이 승객들이 잇따라 객실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탐정이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사람들을 내쫒고 비명 소리에 돌아온 경위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현장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설마 이 휴가 중 리버의 경찰 신분증을 유용하게 사용할 일이 생길 거라곤 두 사람 다 상상치도 못했지만, 따지자면 방 안에 드러누운 주검도 자신이 영영 기차에서 내리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고…. 

  탐정과 경위는 나란히, 범인 제외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을 살인 사건 현장을 둘러본다. 

 “…이걸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는 게 참 하이디답다고 할까….” 몇 번을 다시 봐도 참혹한 광경에 리버 챈들러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나도 놀랐거든. 남들처럼 소리만 안 질렀을 뿐이지….” 하이디 켈러의 안색도 썩 좋지는 않았다. 가엾은 스미스 씨의 사인을 추정하는 데엔 섬세한 추론 능력까지도 필요 없었다. 침대 시트부터 벽, 바닥까지 온통 튄 혈흔을 보면 누구든 그가 가슴 복판의 자상 때문에 죽었다고 판단할 테니까. 시신에는 심지어 화려한 세공의(아마도 기차 어딘가에 장식으로 걸려 있었을)단검마저 그대로 박혀 있어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조난 요청은 했대?” 하이디가 시신 앞에 몸을 굽혀 앉으며 물었다. “통신이 먹통이래.” 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눈보라가 그친 뒤에 다시 시도해 본다던데.”

  “앞 칸으로 가는 길은 어땠지?”

  “지금부터의 이동은 문제 없을 것 같은데,” 대답하다, 그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곧 깨달은 리버가 신중히 기억을 되짚었다. “-처음에 열려고 시도했을 땐 아예 꽉 막혀 있었지? 밤새 눈이 얼어붙어서. 특별한 흔적은…응, 없었어. 방금도 몇 사람이 함께 고생해서 겨우 열었으니 혼자 드나드는 건 무리였을 테고.” 

  “그렇다면….” 하이디 켈러가 말 끝을 흐렸으나 리버 챈들러 역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B호차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면 용의자는 이 칸에 탑승해 있던 열 명으로 좁혀진다. 리버는 지난 저녁 두서없이 소개받은 승객들의 이름과 방 번호를 대조해 본다. 대화를 나누며 주워들은 신변잡기를 복기하는 건 덤이다. 타인을 살피고 배려하는 성품은 달리 접근하면 수사 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무기가 된다. 이제까지 유용히 사용해 왔듯이….

    “‘메리 크리스마스’.” 상념에 빠져 있던 리버 챈들러는 잠시 귀를 의심했으나, 곧 그 느닷없는 덕담이란 단지 시신의 가슴 포켓에 꽂혀 있는 카드의 문구를 읽은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카드를 집어 든 하이디 켈러는 묘한 얼굴로 필체를 살피다가 툭 내뱉었다. “…신장 5.6피트 정도, 왼손잡이에 체구가 크지 않은 여자의 필체군….”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어?” 좀 지나치게 구체적인 프로파일링에 리버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봤다. “뭐 그런 게 있어….” 딱히 대답처럼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과 함께, 탐정은 거침없이 시신의 옷깃을 헤집는다. 레이스 장갑이 금방 피에 젖어 못 쓰게 되어버렸으나 그는 늘 그렇듯 개의치 않고 단검이 꽂힌 자상 부위를 드러냈다. 

  “흉기랑 상처가 안 맞아.” 하이디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리버는 친구 옆으로 이동해 끔찍하게 벌어진 상처를 함께 들여다봤다. 단검은 날이 널찍해 여린 피부를 좌우로 넓게 가르고 박혔다. 그러나 모습만 위협적인 날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면, 갈비뼈를 부수고 깊이 들어간 폭 좁은 자국이 겹쳐져 있다. “확실히 이상하네. 이건 거의 송곳으로 찌른 흔적에 가깝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상처를 보던 리버는 문득 손을 뻗어 잔뜩 홉뜬 시신의 눈을 감겨 줬다. 직전까지 함께 있던 이의 이런 몰골을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저, 경찰은 언제 옵니까?”  때마침 문가에서 소심한 기척이 들렸다. 지난 밤 카드놀이를 함께 하던, 그리고 높은 확률로 용의자 중 한 사람일 B호차의 승객이었다. 그 뒤에도 얼굴이 눈에 익은 젊은 부부가 불안한 듯 방 안을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눈보라 때문에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정중히 안내하려는 찰나, “경찰 여기 있는데요….” 하이디 켈러가 대뜸 리버 챈들러를 가리켰다. 

  아니, 맞기는 하지만! 지금의 질문은 진짜 경찰을 찾는다기보다는 ‘그래서 우린 언제 나갈 수 있나요’ 를 돌려 말한 것 아닌가? 게다가 이 지명이 ‘귀찮은 일은 맡길게’ 의 하이디 켈러 식 표현임을 아는 리버가 황당하다는 듯 하이디를 바라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삼삼오오 몰린 승객들은 그 대강 대충인 발언에 제법 안도감마저 느끼는 얼굴을 한다. 작금과 같은 비상 사태에서 경찰만큼 믿음직한 직업군도 또 없으며, 심지어 이 젊은 경위는 최근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 전적마저 있다. 거기다 지난 밤의 사교회까지 더해져 리버 챈들러는 썩 신뢰받는 형사님- 다시 말해 ‘이 난관에서 우리를 도와 줄’ 대표 격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결국 직업적 특성으로 보나 타고난 성향으로 보나, ‘사람’ 을 대하는 건 언제나 리버 챈들러의 몫이다. 그것이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간에. 그리고 다소 건조하고 차가운- 결코 인간의 언어로 웅변하지 않는 이론과 증거 사이에 파묻히는 쪽이 하이디 켈러에게 어울리는 몫이다. “거절당한 러브콜은 그만두는 게 도의상 맞겠지만, 챈들러 경위님….” 이제 눈을 감은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하이디 켈러가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속삭인다. “어째 한 번 더 협업할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뭐가 필요해, 탐정님?” 그리고 어쨌든 경찰 공무직의 겸직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를 제지할 만한 다른 공권력은 이 기차 안에 없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위가 허리를 조금 숙여 주었다. 탐정은 승객들이 들을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가 해내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다. “B호차 사람들을 모아 놓고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줘. 그리고 간단히 신원을 정리해 줘. 저 사람들…어제까지만 해도 네게 우호적이었겠지만 그렇게 묻다 보면 방어적으로 나오는 구석이 꼭 한 군데씩 있을 거야. 고향이든, 작위명이 아닌 본명의 퍼스트 네임이든, 오스왈드 가와의 관계든, 죽은 사람과의 친분 여부든… …그 부분에 대해 알려줄 수 있겠어?”

  “맡겨만 줘.” 리버 챈들러가 자신 있게 말했다. “하이디치고는 묘하게 적극적인걸. 해결하고 싶은 이유가 생긴 거야?”

  “이 사건은 이상해. 이 방 안에서 나온 모든 증거들이 다 거짓말이거든….” 망가진 장갑을 벗어 깨끗한 끄트머리를 바투 쥔 하이디는 시신의 포켓에서 찾았던 카드를 집어 리버가 글자를 읽을 수 있게 했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날카로운 촉의 필체는 놀랍게도 리버 챈들러에게 제법 익숙한 것이다. 신년이나 연말, 생일, 휴가철에 종종 날아오는 짤막한 엽서에서 자주 본. “이건 내가 오스왈드 노부인의 초대장에 답을 보내며 썼던 문장이야.” 그제야 리버는 탐정의 과한 확언이 어디에서 온 건지 깨닫는다. 본인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카드는 내 필체를 본땄고, 진짜 흉기는 사라졌고, 몸싸움한 흔적도 없는데 시계는 우그러져 멈춰 있지. 아마 이 사람 이름도 진짜 스미스는 아닐 거야.  아마 사정 청취를 하다 보면 리버 네가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하이디 켈러가 친구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부터 사건 관계자, 혹은 용의자들이 두른 말의 갑옷을 끈질기고 부드럽게 흔들어내어, 그들이 행간에서 흘린 증언을 수집하는 능력이 빛을 발할 시간이다. 리버가 아직도 무섭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한 번 보고 손목시계를 봤다. “눈이 저렇게 오니 범인이 도망치지는 못 했겠네. 두 시간쯤 뒤에 만날까?” “내 객실로 와. 아마 네 방은 나중에 못 쓰게 될 테니까….” 기어코 굽 있는 구두를 벗어던지며 하이디가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내 방을 못 쓴다고…?” 복도 맞은편, 제가 쓰던 4번 객실을 문득 돌아본 리버의 등에 대고 탐정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 하나를 더 던졌다. “나는 필체를 뺏겼고, 그럼 너는 이 사건에 어떻게 엮였을까…. 가서 네 짐가방 한 번 열어봐. 그거 보고 나면 방 바꾸고 싶어질걸.”

  리버는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으나 하이디는 구두를 복도 밖에 대강 던져버리고 피해자의 짐가방을 끌어당겼다. 주인 잃은 구두나 한 켠에 얌전히 놓아 준 경위는 고개를 갸웃하며 제 객실로 돌아갔다. 어쩐지 뒷목이 싸한 기분이 들었다. 전날 밤 잠옷을 꺼내고 닫은 그대로 얌전히 놓인 짐가방을 열어 본 리버는 그대로 가방 문을 쾅 닫았다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다시 열었다. “거짓말이지…?” 중얼거려도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은 변함이 없다. 

  가방 중앙에는 송곳을 닮은 날카로운 칼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핏자국은 없으나 어쩐지 쇠 냄새가 나는 듯하다. 리버 챈들러는 맞은편 객실을 돌아보았다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창 밖을 오래 내다보았다. 

  “정말 기대 이상이네….” 경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향한 말인지, 간 크게 경찰 옷가방에 흉기를 숨긴 범인에 대한 감상인지… …주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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