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 예약?”
“그냥 한 해 넘기기도 아쉬우니까. 크리스마스기도 하고.”
또다시 한 해가 저무는 연말. 기차표 두 개가 눈앞에서 맥없이 흔들리자 헤이든은 의아해했다. 디오르와 함께한 지 꽤 되었음에도 이런 식의 데이트 신청은 처음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둘은 아주, 아주, 아주 바빴기 때문이다. 세계를 지키기 위한 비밀조직에는 그 어떠한 휴식도 보장받지 않는다. 악당들에게는 홀리데이도 없는 모양이다. 연말이 되면 미룬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듯이 사건 사고를 있는 대로 터뜨려주신 덕에 둘은 연말이 되면 남들보다 세 배로 일해야 했다. 요 일 년 간 뭐 하시다가 이제 서야 쳐 기어 나오셔서 일들을 저지르시는지 모르겠다, 그게 작년 헤이든의 연말 감상이었다.
“그래도 돼요?”
“상부는 휴가를 허가해 줬어. 인계 절차도 끝났고. 아무래도 최근 너무 부려 먹은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야. 복-지라는 거지, 복-지. 정신적으로 연말을 한 번쯤은 제대로 즐겨놔야 한다나 뭐라나.”
“남들은 다 있는 휴간데 생색은 엄청나게 내네요.”
“내 말이.”
그럼에도 헤이든은 다소 들뜬 듯 기차표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평소보다 더 꾸민 듯한 모양에, 인쇄까지 고급이다. 심지어 24일부터 31일까지를 함께할 수 있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짧으면 아쉬우니 연말 패키지로 끊어보았다, 는 디오르의 말을 듣는다. 분명히 비쌌겠지. 그렇지만 가격을 셈하느니 지금 떠오르는 기쁨에 집중하기로 헤이든은 마음먹었다. 그리고 동시에 빌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없기를. 그도 그럴 것이, 저번 크리스마스 때는 정말 최악의 사건에 휘말렸다. 세계의 존망을 다루면서 살아가지만, 그날의 사건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했다. 디오르를 잃을 뻔한 일. 다시 그런 일이 없기는 바랐지만,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게 그날의 악몽을 또 떠오르게 만든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헤이든은 그리 생각했다.
리스와 포인세티아 따위로 열심히 장식해 둔 기차 안으로 들어선다. 밖은 추웠으나 눈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쉽네, 눈이라도 내리면 딱 좋을 텐데, 그런 디오르의 말에 가벼이 동조했다. 좁은 복도를 걸어 자신들이 있을 칸의 문을 연다. 침대가 딸린 곳으로, 7박 8일의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적당한 크기였다. 애초에 기차 객실에 딸린 침대에 높은 수준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캐리어를 구석에 놓고 나서 헤이든은 기차의 창을 열었다.
“추워.”
“참아요.”
에취, 하면서 괜히 엄살 부리는 남자를 무시하고 바깥 풍경을 본다. 아직 출발하지 않은 기차 너머의 풍경은 지저분한 선을 지나 들판과 산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쁘지 않네, 하고 헤이든은 다시 창문을 닫았다. 코트를 벗고, 옷을 갈아입는다.
“파티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
“누구 씨가 자꾸 궁금하다고 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거든요? 영광으로 아세요.”
디오르 몰래 맞춘 옷이었다. 요즘은 멸망한 듯한 오래된 양품점에 맡긴 옷으로, 이번 기차 여행에 파티가 껴 있다는 사실을 알자 바로 부랴부랴 주문했다. 그 바쁜 날 사이에 열심히 가게에 들러서 이야기 나누고, 치수를 재고, 뭐냐고 묻는 디오르를 무시하고, 힘내서 옷을 맞추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건 헤이든의 최대 칭찬이다. 부스럭거리며 부산스레 옷을 갈아입은 헤이든을 보는 디오르의 고개가 잠깐 돌아간다.
“불만 있어요?”
“아니, 꽤 귀엽다 싶어서~?”
“멋지다가 아니고?”
“어… 멋지진 않지.”
“멋지다고 해!”
“멋지진 않지.”
이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디오르 블랙의 반응은 한결같다. 이 남자는 언제나 가볍게 굴면서 자신을 깔보듯이-귀여워한다가 맞겠지만- 반응을 한다. 나도 멋진 모습 보여서 저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싶은데. 매 차례 실패하면서도 매 차례 다짐하는 헤이든 슈나이더였다. 이번에도 수포가 된 상황을 치워두고, 헤이든은 객실 침대에 몸을 기댔다.
“생각보단 괜찮네요.”
“아까부터 그 소리 하고 있는 거 알아?”
“아니? 아닐걸?”
“네네, 아닙니다.”
“사람 말 좀 들어라?”
“에엥, 뭐가 또 심통이 나셨을까아.”
“진짜 질린다…”
그대로 시간을 보내기엔 뭣해서 헤이든은 침대에 벌써 누워 뒹굴뒹굴하는 디오르나 바라보기로 했다. 이 남자는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파티 시간까지는 좀 오래 걸린다고 했지만, 이런 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얄밉다. 이 남자 때문에 겨울마다 개고생해야 했는데. 심지어 첫 만남은 여름으로, 그 여름도 최악이었다. 나 이 남자랑 왜 같이 지내는 거지!? 이미 청혼까지 받아놓고 이딴 생각을 인제야 하는 헤이든 슈나이더였다.
“안 보여줄 거예요?”
“으음, 파티복 말이지. 원해?”
“형이랑 나, 매번 요원복만 입고 사니까. 무엇보다 그런 건 나한테 먼저 보여줬으면 하는데…”
“그렇네,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디오르는 비싸게 굴지는 않겠다는 듯이 환복을 시작했다. 천천히 남자가 구색을 갖춰 입기 시작하면 헤이든은 질투와 같은 감각을 느낀다. 괜히 멋있단 말이야. 자신이 이 남자에게 반해 있는 데다가 몇 년째 연인인 걸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툭 뱉고 또 고개를 저었다. 다소 추레한 상태였던 디오르가 머리 세팅까지 마무리하면, 이 사람 진짜 좋은 곳에서 나고 자랐구나, 하는 태가 났다.
“그렇게 멋지진 않네요.”
“와악, 너무해.”
“…… 있죠, 형.”
“왜?”
“그냥 별거 아닌 질문인데, 이렇게 잘해줘도 돼요?”
“…… 와, 그거 엄청나게 너무한 말인데.”
“먼저 못 해주는 게 누군데 그래.”
“그건 할 말이 없네요…….”
남자는 침대에 앉는다. 헤이든 옆에 앉은 디오르는 어깨에 그 세팅된 머리를 얹었다. 괜찮은 거야? 머리 망가져요. 가벼운 말에 대꾸 없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디오르는, 손을 잡았다. 헤이든이 마주 잡아주면, 그제야 자기 고해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난 네가 좋으니까…….”
“…… 그렇게 좋으면 좀 잘하지.”
“그래서 잘해주려고 하는 거잖아. 앞으로는 더 잘해주려고.”
“…… 놀리는 거부터 어떻게 하죠?”
“그건 안 돼.”
“야.”
가벼운 터치가 몇 차례 있고 나서 둘은 다시 고요해진다. 서로에게 기대어 멍하니 있는 것처럼 온기를 나눈다. 아마도 같은 추억-혹은 악몽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곱씹고 있겠지. 둘에게 이번 1년도 너무나도 길었다. 내년도 길 거고, 내후년도 길 터이다. 직장을 때려치우면 해소되는 일이겠으나 그걸 그만둘 생각은 없다. 그 모든 일에도, 그들은 헤어질 생각도 무언가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술 몇 잔 마실 거야?”
“샴페인 두 잔 정도만요.”
“나는 만취하고 싶은데, 안 되려나?”
“혼자라면 잔뜩 드셔도 됩니다.”
지금의 시간은 길게 느껴져도 1월 1일이 되면 8일 따위는 금방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 숨만 쉬고 있는 시간을 조금 소중히 하자고 둘은 생각했다. 바빠서 쉬는 허덕임이 아닌 평온한 숨을. 그때도, 저 때도, 이때도, 늘 뛰어다녔으나 오늘은 다르니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미리 말해도 돼?”
“우연이네요, 저도 정말 하고 싶었거든요. 작년에도 미묘하게 늦었었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나.”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날 주제에 미리 선언하는 이유는, 둘만의 비밀이기에 차마 적지 못하는 걸 알아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