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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속도는 빠르게 흩어지는 설원의 풍경으로 알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온통 새하얀 풍경이 연이은 도화지처럼 이어지지만, 군데군데 솟은 침엽수들의 모양과 위치들이 같은 장소가 아니고 끊임없이 달리는 열차 밖 풍경임을 알렸다.

누군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좋아할 소복이 쌓인 하얀 눈에 잠식된 세상은 고요하기만 하여, 열차가 선로를 달리며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적막했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고 어느 객실 앞, 창가에 한 인영이 던져지는 소리가 우당탕 울린다.

 

등을 창가에 부딪친 인영이 바로 반격하듯 팔을 뻗지만 가볍게 몸을 흘리며 피한 상대는 곧 인영이 무어라 소리치기 전에 그의 입을 틀어 막는다.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사내의 입과 코를 덮자 그 아래에서 억눌린 소리가 울린다. 악에 받친 또는 비명과 같은 절규. 그러나 사내의 앞에 선 이는 별다른 망설임도 자비도 없이 하얀 설원 위를 달리는 열차의 창을 밀어 올린다.

삽시간에 열차 복도에 냉기 서린 칼바람이 들이차며 밖의 설원이 얼마나 차디찬 풍경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그 온도를 피부로 느낀 사내가 다리를 버둥대며 마지막 저항을 시도한다. 무릎을 세워 앞에 선 이의 옆구리를 가격하려 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하얀 장갑의 주인이 움직였다.

 

"좋은 여행을."

 

사람의 상체 하나가 겨우 지나갈 크기의 열차 창문. 그 안으로 신원불명의 사내가 속절없이 떠밀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빠른 열차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누군가의 생명이 꺼지는 비명은 열차 기적 소리와 맞물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절멸이다.

옷자락을 뒤흔드는 칼바람을 맞으며 열차 복도, 창문 앞에 선 사내는 붉은 얼룩이 묻은 하얀 장갑을 벗어 낸다. 침입자의 피가 얼룩진 하얀 장갑은 그대로 그 주인을 따라 설원의 풍경 속에 던져지고 탁, 창틀이 내려와 닫힌다. 어스름처럼 내려앉은 냉기가 남은 복도의 기온만이 방금까지 있던 일의 유일한 증인처럼 일렁였다.

 

"일카이…?"

 

사내가 서 있던 복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객실 하나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작게 열린 틈새로 흘러내리는 녹음의 싱그러움을 지닌 긴 머리카락이 아직 남은 바람결에 흔들린다. 그 뒤 빼꼼히 이어지는 졸음이 섞인 푸른 시선에 눈을 맞춘, 일카이라 불린 사내는 바람에 흐트러진 은백발의 머리를 장갑이 사라진 새하얀 손으로 쓸어 넘기며 미소로 화답했다.

 

"잠에서 깨셨습니까? 아가씨."

"…눈을 떴는데 일카이가 안보여서요."

"잠시 식당칸에 다녀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눈을 뜨시면 디저트를 준비해드릴 시간이라."

 

일카이는 복도를 둘러보며 말을 잇는 소녀가 선 객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융단이 깔린 열차의 복도는 발걸음 소리마저 흡수하여 오가는 이의 인기척도 차단했다. 다른 객실 안쪽에도 분명 사람들이 있는데 복도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하다.

 

"오늘의 디저트는 푸딩입니다."

 

오로지 두 사람의 대화 소리만 들리던 복도는 객실 문이 닫히며 두 사람이 안으로 사라지자 다시 적막을 찾아 고요함 속에 잠겼다. 저 끝없이 반복되는 설원의 풍경처럼.

 

 

 

 

사건의 시작은 얼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왕국령이 밀집된 대륙. 그 속 작은 왕국 베르쿠트령. 대제국의 여왕을 뽑는 계승 전에서 서열을 차지하지 못한 이 작은 왕국은 권력 다툼에 크게 연루되지 않고, 타국의 침략을 탐하지도 않으며 소소한 평화가 이어지는 국가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라고 하면 이 작은 국가에서도 차기 왕좌를 누가 가질지 계승 서열을 두고 벌어지는 내부 암투뿐인데, 왕령의 크기와 힘에 비해 자손이 번성한 탓이었다.

손이 많은 왕가란 어느 방면에서는 축복 받은 일이지만 권좌 앞에서는 제 아무리 가족이라 하여도 개개인의 이권 다툼은 필연적으로 만들 뿐이라. 일카이는 자신을 부른 베르쿠트 국왕의 빈 옥좌 앞에 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은 이제 갓 성인을 앞둔 십 대의 소녀로 올해를 넘기면 성년이 되었다. 천성이 모질지 못하고 유함을 타고나 권력 다툼이나 승계 서열이니, 재력이니 하는 것들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그는 이미 승계 전쟁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평화롭고 소소한 행복의 나날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왕녀라기에는 공녀에 더 어울리는 이의 이름은 아이실라 베르쿠트. 사내, 일카이가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소녀다.

녹음이 가득한 긴 머리카락이 하늘거리고 푸른 하늘이 박힌 두 눈망울이 그 누구든, 상대를 자애롭고 다정히 바라보곤 하는 아이실라를 몇 해 전부터 집사 겸 호위 겸 최측근의 자리 등을 겸하며 보필해온 일카이. 여러 방면에서 유능한 사용인이라 평가 받는 그라도 확실히 국왕의 갑작스러운 호출은 예상외였다.

베르쿠트 왕가에서는 출신도 모르고 가족도 없는, 근원이 정체불명인 사내가 소중한 왕녀의 곁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게 퍽 탐탁지 않다는 시선을 여러 번 느꼈으나, 설마하니 낙엽이 진 정원을 정원사와 함께 정리하다 불려올 줄은 그라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왕성의 알현실, 그곳의 대리석 바닥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일카이는 설마, 베르쿠트 국왕이 이제 와서 자신의 처우를 논하기 위함인지 추론 중이었으나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난처했다. 사내가 베르쿠트령에 와 아이실라 베르쿠트를 보필한 지 벌써 여러 해인데, 이제 와 국왕이 자신의 처우를 거론하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에 오늘의 이 부름이 더더욱 영문을 모르는 부름이었다.

 

"국왕 전하 들어오십니다."

 

국왕에게 책잡힐 실수가 무엇이 있나 그 몇 해의 기억을 되짚던 일카이는, 자신의 실수라고는 몇 달 전 정원에 숨어든 고양이를 처리하지 못해 산책을 거닐던 아이실라 아가씨의 치마폭에 돌진하게 만든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막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왕의 행차였다.

알현실에 들어선 그가 호위들에 간단히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자 일카이 역시 아까와 같이 다시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은 모든 기억을 되짚으며 베르쿠트 국왕이 던질 예상 질문 안을 산출해내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무표정하니 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라. 그래, 자네가 아이실라를 보필하는 일카이라고 했나?"

"예, 전하.

"흠. 듣던 것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생겼군."

"과찬이십니다."

 

 

소문으로는 어떤 침입자도 맨 몸으로 상대해 자객처럼 처리해버리고 백 대 일로 싸워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괴물 같은 사내라는 허무맹랑한 평이 국왕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일카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점수 따기는 틀린 상황이었다.

애초에 소문이란 퍼져나가며 입을 하나씩 거칠 수록 부풀려지기 마련인데, 그 부풀려지는 쪽이 좋은 방향인 적인 한 번도 없었던 터라 베르쿠트 국왕에게 어떤 괴물로 묘사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 아이실라는 건강한가."

"왕녀님은 제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여 보필하고 있습니다."

"근래 이 권좌를 가지고 머리 아픈 형제 싸움들만 듣다 보니 반가운 소리군. 그 아이 만큼은 조용히 무탈했으면 하거든."

"… …염려하시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 이해했습니다.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일카이, 자네에게 내 청을 하나 하지."

"듣겠습니다."

"그래… 아이실라가 내년이면 스무 살이 되지 않나. 어서 좋은 혼처도 잡아줘야 하거늘. 그 아이가 이대로도 좋다고 그러니 내 아버지 된 도리로 무엇이든 해주고 싶다네."

 

베르쿠트 국왕이 하는 이야기를 요지부동의 자세로 듣고 있던 일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국왕이 '혼처'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부터 변화한 인상은 그의 자세 탓에 국왕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이실라 베르쿠트와 일카이의 인연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대륙의 여왕을 뽑기 위한 궁중 암투에서 살아남은 왕녀와 그 곁을 지킨 집사-라는 흔한 레퍼토리. 그 속에 두 사람 사이에 싹튼 감정의 편린을 권좌의 주인을 알 리 없었다.

설령 알고 있다 해도 모른 척할 것이 분명했다. 신분을 초월한 관계의 끝은 귀부인들이 다과회에서 모여 읽는 책 속 이야기처럼 행복한 결말로만 이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일카이는 아이실라 베르쿠트를 향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숨기는 것이 능숙한, 완벽한 집사였다.

그러나 때때로 이렇게 다가오는 상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체감은 사내의 갈무리된 표정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해서, 일카이는 국왕이 다음 발언으로 어떤 말을 해도 태연히 답할 수 있을지 다소 자신이 없어졌다.

 

"일카이, 그대 나의 딸이자 베르쿠트 왕국의 왕녀 아이실라 베르쿠트를 보필하여 열차 여행을 다녀오게."

"예. …예?"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국왕의 발언에 일카이가 자신도 모르게 예법을 어기며 의아함이 찬 되물음을 소리 냈다. 다소 뜬금없는 전개. 정말 의외의 발언에 많이 당황한 듯 고개까지 든 일카이는 베르쿠트 국왕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예를 구하였다.

베르쿠트 국왕은 그런 일카이의 행동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별달리 반응하지 않고 허허, 너털너털한 웃음을 흘렸다.

 

"이웃국과 열차 선로를 잇는 대규모 공사가 마무리 되어 이제 여왕의 알현이 한결 편안해졌지 뭔가. 열차 시연회를 겸하여 성대한 열차 파티를 개최한다고 하니, 초대장을 받았는데 이를 아이실라가 가고 싶어 하던 눈치란 말일세."

 

국왕이 조잘조잘 하는 이야기를 고개 숙인 채 듣던 일카이는 새삼, 자식들이 서열 싸움을 할 정도로 많아 평소에는 자식들에게 무심하다 평이 자자한 그도 이럴 때는 아버지의 모습이군-그런 생각을 한다. 국왕이 이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그렇다는데 아비 된 자로서 응당-이란 말까지 흐를 때쯤 피식, 소리 없이 웃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하는 말이 이해되고도 남을 정도로 옳은 말들뿐이었다.

필시 가고 싶으나 자신에게 달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을 테다. 그저 안절부절못한 눈짓과 그런데도 열망하는 눈빛이 힐끗거리듯 제 아비에게 향했겠지.

직접 그 자리에서 본 것이 아님에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그날의 풍경에 일카이는 남모르게 웃다가 표정을 다시 무표정하게 바꾸며 '전하'하고 조심스럽게 발언 기회를 청하였다.

아무튼 딸자식의 성년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친히 열차 여행을 보내주기로 했다는 설명을 주절거리던 국왕이 그래, 말하게. 발언을 허락했다.

 

"왕녀님을 보필하는 것은 제 본연의 임무입니다. 이리 따로 부르시어 청하실 것이 아님에도, 어찌하여 소인에게 그런 청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흠… 그게 말일세. …아무리 아이실라가 권좌에 관심이 없다 한들 혈육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왕가의 핏줄이 아닌가."

 

그래서 그렇네. 국왕이 짧게 설명을 끝내자 일카이는 이내 이해했다는 양 입을 다물었다.

성대한 파티가 될 걸세. 아이실라가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멋진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네. 일카이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국왕의 너털웃음이 섞인 말들에 명령을 받은 사용인은 고개를 더욱 숙여 그를 받들겠다는 의지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현재.

 

일카이는 객실 안에서 새로운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우며 낮잠에서 막 깨어나 아직 피곤해 보이는 아이실라의 앞에 식당 칸에서 준비해온 커스터드푸딩을 세팅하였다. 달그락, 다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흐르고 곧 티포트에 더운물을 채운다.

단 푸딩에 어울리는 홍차를 우리던 일카이는 아이실라의 시선이 제 손의 움직임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허리를 낮춰 그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었다.

 

"불편하신 것이라도 계십니까?"

"…아, 아뇨. 장갑을 자주 바꾸시는 거 같다는 생각을…"

"아, 식당 칸에서 푸딩을 주문했으나 역시 아가씨께 드릴 건 평소처럼 제가 만드는 것이 좋을듯하여."

 

놀러와서 남의 주방까지 밀고 들어가 푸딩을 직접 만들다 보니 더러워져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태연히 전하는 일카이. 이 말도 안 되는 변명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태연자약하게 내뱉으니 진짠가? 의심조차 할 여유가 없이 상대를 속여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주최 측 입장도 있을 텐데. 주방까지는. 아이실라가 당황해서 실로 정상적인 의문을 지적하자 은은한 홍차가 우려진 티포트를 기울여 잔을 채운 일카이가 느긋하게 그녀의 손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더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식기 전에 드시죠."

 

우려가 섞인 주군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카이의 시선은 한 없이 평온하고 또, 은은한 다정함이 피어 있었다. 평소와 같은 집사의 태도와 표정이 아이실라의 불안감을 씻어주었는지 곧 푸딩을 조심히 한 스푼 떠서 입에 넣는 모습이다.

소녀의 하얀 볼에 발그레 혈색이 돈다. 아이실라는 푸딩을 좋아하여 한입 맛보며 단맛이 입에 퍼질 때 얼굴에 홍조가 돌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스러운 순간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일카이라는 걸 아마도 소녀만이 모를 테다.

뒷짐을 쥔 일카이는 장갑이 끼워진 손가락을 소리 없이 꺾으며 뼈를 풀어냈다. 이 평화롭고 사랑스러움만 가득한 풍경과는 사뭇 대조되는 움직임이었으나, 사실 이 열차에 오르고 나서 일카이가 장갑을 바꿔 낀 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대륙을 이은 대국의 열차는 외견부터 훌륭했다. 최신식 철제들을 사용하여 튼튼하고 형태 좋게 잡은 외양부터 샹들리에가 달린 식당 칸이며 복도마다 융단 카펫을 깔아두고, 각 귀빈실은 귀족들이 사용하는 개인 룸처럼 부족함 없이 꾸며져 있었다. 앤티크한 가구들이나 명화가 걸린 벽면 등. 한 왕국의 왕녀를 초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렇기에 노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대국의 여왕이 각 왕국들의 왕족 및 고위 귀족들에게 친히 파티를 알리는 초대장을 보냈다고 한다면, 평소 정적을 해치우고자 했던 세력과 돈 있는 재력가들을 납치하여 한 몫을 챙기려는 조직들에는 이보다 더 좋을 절호의 기회가 없지 않겠나.

베르쿠트 국왕은 그러한 정적들의 마수에서 왕녀를 안전하게 지킬 것과 더불어 이를 절대 왕녀 본인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까다로운 주문을 내린 거였다. 일카이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다시 한 번 속으로 혀를 찼다. 능구렁이 같은 국왕. 주군의 부친을 나쁘게 모함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수완이 좋은 자였다. 아마 자신의 딸이 그리고 그의 집사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이미 눈치 채고 있으리라. 그래서 이러한 명을 자신에게만 내린 베르쿠트 국왕의 저의를 모를 리 없기에 일카이는 열차에서 내리는 날까지는 주군의 부친을 그리 부르기로 했다.

 

"그, 그리고… …식당칸은… 하, 함께 가고 싶었는걸요."

"… …."

 

푸딩을 조심조심 먹던 아이실라가 한참 만에 입을 열고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말하는 말에 미동 없이 곁에 뒷짐 쥐고 서 있던 일카이의 표정이 살짝 균열 갔다. 꼭 난처하다는 양 눈썹이 슬쩍 아래로 쳐졌다가 금세 되돌아가서 평소의 얼굴을 하지만 힐끗, 눈치를 살피듯 움직이던 푸른 눈망울과 시선이 마주치자 일카이는 평소의 표정을 풀고 졌다는 양 작게 미소 지었다.

 

"샹들리에가 아주 크고 아름답더군요."

"그런가요…?"

"예, 다 드셨으면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잠시 걷다 보면 곧 저녁 식사 시간이 될 테니, 근사한 저녁을 함께하고 돌아오면 될 것 같습니다."

 

일카이가 웃자 푸딩을 처음 입에 넣었던 순간보다 더 만면에 붉은 색이 번지는 것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그는 곧 아이실라의 의자 옆에 반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추고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이 열차 안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함께해주실 수 있을지.

마치 춤을 권하듯. 사모하는 여성에게 마음을 전하듯.

 

 

 

 

 

 

현악단이 연주하는 왈츠에 맞춰 열차의 객들이 능수능란하게 소규모의 무도회를 열었다. 복장은 제각각이었으나 선율에 맞춰 파트너와 움직이는 춤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해야 했다. 각각의 승객들은 열차에서의 소소한 이벤트들을 즐거이 만끽하고 있었다.

일카이와 아이실라 역시 수줍고 부끄럼을 타는 소녀를 리드하며 작은 움직임으로 자신들만의 무대를 즐겼다. 맞잡은 손, 허리와 어깨에 각 얹어진 손. 가까이에서 마주 보게 되는 시간도 적은 두 사람이라 그러한 자세는 실로 몇 년 만이었는지. 여왕의 자리에 도전하던 그때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사내는 느끼고 있었다.

물론 춤을 추는 중간에도 날아온 독침을 능숙히 피하며-그 덕에 아이실라를 품에 확 끌어당겨 안았다가 소녀가 얼굴이 펑 터져서 중간에 기절하듯 늘어지는 걸 받아내는 건 덤이었다-독침이 날아온 방향으로 서버가 옮기던 빈 쟁반을 던져야 했지만. 이러한 요소요소에 숨겨진 액션 장면들도 일종의 즐거움으로 느껴지는지. 일카이는 내내 웃었다.

정신을 차린 아이실라가 잠시 자리에 앉아 찬 물로 목을 적실 때도. 힐끗거리며 일카이를 바라보다 덜컹, 열차가 레일에서 튀어 크게 흔들려 물 잔에서 넘친 물에 얼굴을 적셔 그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어야 했을 때도.

일카이는 모든 게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사내처럼 눈을 접어 미소 짓고 있었다.

 

"연미복 차림이 아닌 건 오랜만인 거 같아요…."

"연미복을 벗을 일이 거의 없긴 하네요. 그 덕에 어색한 기분도 들긴 하는데…"

"자,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아이실라가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자 일카이가 하하, 웃는 소리를 내었다.

 

"아가씨도 아름다우십니다."

"…그…."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마주할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이곳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존재에요."

 

아이실라의 귀 끝이 붉어지는 걸 바라본 일카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새하얀 장갑을 낀 손이 잠시 뒤, 한 박자의 머뭇거림 뒤에 소녀에게 뻗어가며 귀 옆의 머리카락을 살포시 만지려는 듯 하다 이내 거둬진다.

 

"…욕심내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힘들어질 정도로."

"…일카이?"

"예."

 

혼잣말을 중얼거린 일카이를 바라보는 의문에 찬 푸른 눈을 마주한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연미복이 어울리는 집사로서의 일카이로 돌아간 양.

 

"…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까요 아가씨."

"아…. 시간이 벌써. 잠들었다 깨어나면 크리스마스겠네요."

"그렇습니다."

"일카이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거… 바라는 건 없나요?"

 

의자에서 일어난 아이실라의 손을 맞잡고 열차를 걷던 일카이가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식당칸을 나와 귀빈실이 있는 객실칸으로 걷는 내내 고민이 꽤 깊었는지 그가 말이 없자 아이실라가 맞잡은 손을 더 꼭 잡는다.

그제야 자신이 생각에 깊게 잠겼다는 사실이 떠오른 그는 아, 짧은소리를 흘리다 열차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은백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새하얀 설원 위를 달리는 열차 창문에 비친 이는 여전히 출신도 성분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애초에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나 자신의 이름조차 누군가가 부여한 대로 의미 없이 붙여 존재를 의의 했으나, 언젠가부터 그를 소중히 불러주는 존재가 함께였다.

창문에 고개를 들어 곁에 선 사내를 올려보는 작은 몸짓이 함께 담긴다.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소중히 그를 감싼다.

 

"…이미 받아서 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 그래도오…."

"꼭 무언가 하나 주고 싶으시다면 오늘 밤 자정에 열차 후미에서 폭죽을 터트린다고 하니 함께 봐주시는 걸로 해주십시오."

"불꽃놀이를 하나요? 멋져라~"

 

기대 된다는 아이실라의 말에 일카이는 웃으며 다시 걸음을 맞춰 객실로 향했다.

 

 

 

그러나 자정이 다가오는 시각. 아이실라는 일카이가 잠들기 전에 타준 밀크티를 마시고 테이블에 엎드려 곤히 잠들었다. 낮잠도 잤고 자정의 불꽃놀이를 기대하느라 초롱초롱하던 소녀의 정신도 한 순간에 수마에 빠트릴 수면제. 하얀 가루가 든 작은 봉지를 상의 포켓 안에 넣으며 일카이는 아이실라가 잠들고 나서야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조심히 손을 얹어 쓸어내렸다.

보드라운 머릿결이 손끝에 닿아 작은 두상을 따라 쓸어내리면 부드럽게 떨어진다. 색색, 잠결에 숨을 고르는 작은 소리를 들으며 테이블에 기대어 선체로 한참을 자신의 주군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는 곧 달칵, 귀빈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다섯 정도인가. 기척으로 수를 세던 일카이는 오늘따라 찾아오시는 손님이 많아 바쁜 하루라 중얼거리면서도 잠시 걸음을 떼기 전,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더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이실라가 장갑을 신경 쓰며 한 말에 자신이 했던 답변을 떠올렸다. 장갑을 더는 더럽히지 않겠다는 약속. 일카이라는 사내는 필요에 따라 소중한 사람을 약으로 재우기도 하고 태연히 거짓말로 속일 수도 있으나, 그와 한 약속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지키고 싶은 마음만은 확고하여. 그 정도로 아이실라라는 소녀에게 지닌 그의 마음은 각별하여-

 

그는 장갑을 조용히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걸음을 옮겼다.

객실 문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펑-, 펑. 달리는 열차의 창문 너머에 형형색색 빛들이 아름답게 하얀 풍경을 수놓는다. 끝없이 펼쳐진 도화지 같은 설원의 풍경에 붉고 노란빛들이 물들어 번진다. 캔버스에 물감이 물들었다 증발하는 것만 같은 모습은 혼자 보기에는 확실히 아쉬운 풍경이었다.

일카이는 잠든 아이실라가 누운 침대 옆에 앉아 창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기만 하던 열차 안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인사말들이 일제히 터져 나오며 기쁨의 환호성이 울린다.

 

"아이실라."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양손을 맞잡아 다리 위에 얹고 정지된 사람처럼 창밖만 바라보던 일카이는 고른 숨을 쉬며 잠든 아이실라의 이름을 불렀다. 약에 취하여 잠든 이는 쉬이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쯤이면 열차 여행의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만으로 좋은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른다. 언제나처럼 그 곁을 지키며 꼿꼿이 세운 허리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돈하여 넘긴 머리도 변함없는 이 집사는, 그 순간만큼은 하얀 장갑을 벗어두고 앉아있었다.

펑, 펑. 다시 한 번 커다란 폭죽이 검은 밤하늘을 가르고, 성탄절의 자정을 밝힌다. 붉고 초록빛의 불꽃들이 꽃 모양처럼 검은 하늘에 터져나갔다가 별똥별처럼 하얀 눈밭에 쏟아져 내린다.

 

"…아이실라."

 

불꽃의 빛으로 일카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침대에 잠든 이의 방향으로 상체를 살짝 돌린 그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조심스럽게 뻗는다. 객실에 몇 명의 침입자가 도달하여 자신의 목숨을 노리든, 이 열차 파티에서 죽을 위험을 몇 번을 겪었든. 모든 것을 모르고 그저 평온하게 잠든 소중한 이의 뺨에 일카이의 손가락 끝이 닿았다.

깨어지는 세공품을 만지는 양, 아주 조심스럽게 소녀가 지닌 온기를 쓸어내리다…

 

"…함께 보면 좋았을 거 같다고 후회해."

 

잠든 아이실라의 이마 위에 이마를 얹고 일카이는 작게 후회의 언어를 속삭였다.

'일카이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거… 바라는 건 없나요?'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해지는 마음을 달라고 해볼까. 이미 가졌기에 더는 줄 수 없다 해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 네 머리카락 한 올도 다른 이가 볼 수 없게 내가 갖게 해달라고 할까. 전할 수 없는 소망은 많았으나,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것은 분명하여 내린 선택이 가끔 오늘처럼 후회가 된다고 일카이는 고해한다.

 

펑, 펑. 마지막으로 하늘을 수놓는 저 먼 불꽃놀이 소리를 들으며, 잠든 소녀의 입술 위로 한 사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떨어지는 모습이 그림자가 되어 길게 늘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의 사랑."

 

나의 아가씨, 나의 아이실라.

 

불꽃이 서서히 꺼져가는 설원의 빛을 등진 채 자신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일카이는 그날, 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충분히 행복한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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