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이맘때가 되면 세상이 온통 적과 녹으로 물들고는 했다. 길의 한편에 생을 다하거나 사시사철 푸르도록 합성된 소재로 만들어진 키 작은 침엽수가 하나둘 자리를 잡고 빛과 별과 구 따위로 치장되었다. 맑은 종소리로 멜로디를 만들고 수많은 이들이 시를 읊듯 고요히 노래하는 소리가 사람들의 볼을 한껏 붉게 만들었다. 카발리에르 데시는 하늘의 무색을 푸르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된 이래 수십의 겨울을 겪었음에도 이렇듯 푸르고, 희고, 붉고, 또 녹빛인 풍경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믿음이 상이하다는 이유로 박해와 배신의 객체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도 사랑을 표한다며 다시 살아난 성자의 탄신이 그를 믿지도 않는 이들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다만 네가, 양귀비가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던가, 생각하자면….
글쎄.
데시는 아무 음정 변치 않던 말소리와 미묘하게 올라가고 또 내려간 입꼬리나 눈매를 떠올렸다. 눈이 내리면 바깥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지 않겠느냐며 물음을 던지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올라와 있었는지를.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어 보기라도 하려던 빈말이었는지, 혹은 진심으로 철없던 시절에나 하던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리석게도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었으므로 데시는 결국 녹아 흙탕에 뒤섞여버릴 것이 무슨 소용이겠냐는 정 없는 말만을 늘어두곤 했다.
재미없기는.
아니면 낭만이 없거나. 양귀비는 줄곧 그렇게 말하며 다 식어 빠진, 고작 반 모금 남은 커피를 구태여 홀짝이는 소리를 내며 마셨다. 자리를 뜨던 뒷모습이 진정 아쉬움의 표현이었던가? 데시는 그 또한 확신할 길 없었으므로 도통 그 속을 알 수가 없다며 일관했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겨울의 하루일 뿐이었다.
서른 낮밤을 넘게 축일을 준비하더라도, 저를 제외한 모두가 축복의 말을 전하고 그러한 음성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품어내더라도, 자정이 지나면 아무 기적 일어나지 않아 길가를 더럽혔을 뿐인 장식을 치우며 새 나날을 맞이해야만 하는, 그저 추운 겨울의 하루.
데시는 발을 멈췄다. 이런 축제 따위보다는 중요한 일들이 천지였다. 당장 내일이면, 아니 수 시간 뒤 날이 바뀜을 알리는 종이 치거든 정말로 떠날 채비를 마쳐야만 했다. 데시는 한참 적색 빛을 내다보았다. 적이 꺼지고 녹이 켜지는 순간에 곧장 발을 내디뎠다.
1.
그 기차는 고급 승객을 위한 고급 이동 수단을 표방하며 문틈으로 침대를 들이고 온 유럽의 국경을 넘나들며 각지의 부호들을 이끌고는 했다. 그러나 시대의 격변에, 고철과 불타버린 종잇장이 아무 쓸모 가지지 못했을 시기에 명을 다 해 역사 속 찬란으로 전락한 지도 팔십 해가 다 되어간 참이었다. 그러므로 카발리에르 데시는 과연 운이 좋은 편이었다. 성자의 탄신을 축복한다며 단 하루, 유럽을 횡단하는 모든 역과 노선을 지나간다는 열차의 표를 구매한 것은 따지자면 충동에 가까운 일이기야 했으나 데시는 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렇잖아도 먼 곳으로 떠나야 할 참이었으며 비행정은 질리다 못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으므로.
데시가 승강장에 도착했을 때 열차가 역을 떠나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으레 이런 고급 이동 수단이, 아니 고급 관광 상품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열차에 발을 들인 후에는 바나 식당칸을 구경하며 추억을 남겨도 될 법했으나 데시는 도통 그러한 가식을 남에게 내보일 정도로 즐길 성정은 아니었다. 대신 여느 거리와 마찬가지로 적과 녹과 눈송이 무늬 따위로 치장한 것들을 흘기며 제 객실을 찾기나 할 뿐이었다.
다섯 번째 열차, 번호로 이십일.
데시는 꼭 잊지 않으리라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보타이를 매만졌다. 승무원의 도움 없이 고작 가방 하나짜리 짐을 머리 위 짐칸에 올리고 좌석을 당겨 앉았다. 데시는 언제고 고급스러움에는 익숙했으므로 모든 행동이 물 흐르듯 했다. 그럼에도 기실 호화로움과는 거리 멀었기에 기념일의 증표가 확실한 색채와 무늬로 꾸며진 복도며 커튼 따위가 익숙하기보다는 이질감이 들어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고 있자면 하나둘 드레스코드를 맞춘 객들이 분주하게 각기 지정된 차량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수 시간 전 내리기 시작한 눈이 여전했다. 기지에 머물러 있었다면 눈엣가시나 다름없었을, 녹지 않으나 유리창에 들러붙었다가 그대로 기화되어 버릴 싸라기 같은 눈이.
데시는 커튼을 좌에서 우로 잡아당겼다. 암막이 시린 유리창을 스치며 물 자국을 남기면 방은 순식간에 단절된 상자가 되었다. 겨울의 공기가, 고요가 내린 대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고, 생각하며 데시는 눈을 감았다. 미간을 찌푸렸다. 깊은숨을 삼키고, 다시 긴 시간 들여 내쉬었다. 차체에 동력이 가해지고 바퀴가 구르면 관성으로 몸이 후미로 쏠릴 순간을 기다렸다.
찰나에 두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데시는 부드럽게 눈을 떴다.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데시는 그 상자에 갇힌 무엇도 바뀌지 않았음을 알았다. 다만 단 두 번, 문을 두드린 소리의 울림만이 여전했다. 데시는 입을 열어 대꾸하려 했으나 그 전에 흑단으로 된 문이 철제 레일에 가볍게 미끄러지며 공간을 열었다.
여기가 이십일 번 객실, 맞나요?
그러니까, 너는 꼭…. 네 언어가 아닌 언어로 수사數詞를 입 밖으로 꺼낼 때 이질감을 느낀다고 말하고는 했으므로 한 단어 발음만을 듣고도 그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양귀비는 너스레를 떨며 객실 안으로 발을 들이더니 몸을 감싼 코트를 벗었다. 데시가 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두려거든 양귀비는 그런 대접이 퍽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낮췄다. 다시 허리를 펴며 문을 당겨 닫았다. 빈자리를 찾아 제 집에서나 그러하듯 등을 기대앉았다.
신사적이셔라. 고마워요, 세뇨리…. 아니, 무슈?
….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라던가. 아직 영국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젠틀맨이 낫겠어.
그게 대중적이기도 하고. 양귀비는 클로슈를 벗어 제 옆에 내려두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쓸어 정리하는 양을 보고 있자면 언젠가 연인을 상정한 연기를 해야만 했던 임무가 떠오른 듯도 했다. 너는 언제나 사람을 놀리듯 여유를 부리고, 꾀어냄을 염두에 둔 언행을 보이고는 했으나 그게 진심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없다고 여겼으므로.
별 일이네. 이런 열차가 전 노선 운행을 다 하고…. 날씨도 궂은데.
이런 열차?
그야…. 사람이 죽은 열차잖아? 누구도 내릴 수 없는, 폭설로 뒤덮힌 겨울을 내달리면서, 살인자들을 버젓이 태우고.
그건 허구의 이야기이지 않던가.
눈 오는 날 살인자들을 태웠다는 점에서는 허구를 실현하고 있는 꼴 아니야? 낭만 없기는.
…그건 또 대체 어떤 낭만인가?
데시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제 손목을 감싼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한 번, 동시에 시와 분을 알리는 침의 순간이 격차를 두고 한 번씩 움직였다. 작은 종 짤랑이는 소리가 문 너머 복도로부터 울려 퍼졌다. 레일을 박차며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둘은 신문도, 책도, 그 흔한 휴대전화 따위 기기도 꺼내두지 않았으나 그저 가시 같은 침묵을 유지했다. 차체에 속력이 붙으며 귀가 먹먹해질 찰나에 짓눌릴 듯한 무게를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양귀비가 건조하게 닫은 입술을 뗐다.
그래서, 종착지는 어디야?
그것도 모르고 탄 건가?
네가 알려주지 않았잖아. 태우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고.
양귀비는 손을 뻗었다. 빛을 온전히 가리도록 당긴 커튼의 끝을 잡아 제 가슴 앞으로 끌었다. 종이 울린 지 일시경도 되지 못했음에도 금세 최대의 가속을 얻은 열차의 창에 눈이 대각으로 가로질러 창을 때렸다.
베네치아.
자연과 인공이 부딪혀 내는 불협화를 가로지른 말이 의외의 장소를 품었으므로 양귀비는 일순 데시와 눈을 맞추었다. 카발리에르 데시는 향수를 운명처럼 타고나도록 품은 자로 언제고 제가 나고 자란 곳을 그리고는 했으나 정말로 그곳을 찾으려 든 적은 한순간도 없었던 탓이다. 축축한 천을 당겨 쥔 손을 놓으면 커튼이 제자리로 돌아서며 빛이 가리고, 다시 비추기를 반복하며 점멸했다. 그리하여 다시 암전의 공간이 마련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양귀비는 정말 괜찮겠느냐, 하는 의미 따위를 담은 물음을 꺼내지는 않았다.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으면서 하나뿐인 답을 얻기 위해 마음을 후벼 파는 일이 얼마나 무용한 행위던가?
그래.
양귀비는 그것이 무용을 넘어 사무치도록 큰 구멍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알았다. 다만 물음을 대신할 말로 적절한 단어가 몇 없었으므로 개중 가장 짧은 것을 택했다. 한 마디 음성이 무겁게 그리고 서늘하게 침묵을 매웠다. 광택이 죽어 무엇 하나 비치지도 않는 암막 커튼에 시선 둔 채로 양귀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카발리에르 데시는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겠다, 생각하면서.
2.
베네치아를 향하는, 그것도 값비싼 관광용으로 기차표를 끊은 이유는 지극히 충동적인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충동이라는 단어는 카발리에르 데시와 상당히 거리가 먼 단어였기에 그는 열차에 앉아 몸이 움직이는 이 순간에도 자신의 행동에 적절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는 밟지 않으리라 다짐한 땅을 자신의 신세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상당한 돈까지 지불했음에도 구경도 하지 않고 답답한 열차칸에 처박혀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러나 이성이 모순을 찾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겪는 이 상황이 영 비현실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가장 현실감 없는 인물이 맞은 편에서 커튼 너머의 풍경을 보고 있지 않은가.
“더 묻지 않는군.”
“우리가 이런 일을 서로 묻는 사이었던가?”
“아니지. 하지만 한번쯤은 궁금할 법도 하지 않았나 싶어서.”
“글쎄.”
양귀비의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가라앉는다. 여전하고 바람직한 자세로군. 데시는 납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카발리에르 데시는 눈 앞의 존재가 과거의 망령임을 알았다. 그는 유령같은 초자연현상을 믿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환각을 겪고있다 여겼다. 나의 환각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어도 되지 않는가? 자문했으나 곧 카발리에르 데시가 알고 있는 양귀비의 모습이 아닌 양귀비를 과연 양귀비라고 부를 수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에 그는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잠시 내릴 뿐, 커튼 너머 창문 밖 풍경을 응시하는 이에게 따져묻지 않았다.
한편, 양귀비는 시덥잖은 주제를 들먹이는 상대방에게 눈길을 잠시 주었다 다시 커튼을 바라보았다. 부러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그가 아는 데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타인에게도 도통 관심을 갖지지 않았다. 이는 양귀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텐데.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어진 이유라도 생겼어?”
평소 사람이 하지 않던 일을 하면 곧 죽는다던데.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며 양귀비는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새삼스럽게 우리는 지낸 시간에 비해 대화를 많이 해보지 못한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 편했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해. 데시는 망설임없이 긍정을 표했다. 온갖 지저분한 인간들이 모이는 블랙워치인만큼 제각각 사연도 다양했다. 진실 앞에 떳떳하지 못한 사람, 과거를 감춰야하는 사람, 수십가지 불법에 연루된 사람. 동료 의식이라곤 없고 약점을 잡히면 뒷조직에서조차 어울릴 수 없게 되기 마련이라 둘은 서로를 동료로서서 꽤 괜찮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호화 열차에 탑승해 이들을 감시할만한 블랙워치나 오버워치 인사도 없거니와, 5번째 열차의 21번칸은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설계를 마쳤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는 성정이 아니니 이대로라면 어색한 정적이 여정을 마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낯선 여행길, 낯선 장소. 그렇다면 대화도 평소 꺼내지 않았던 주제여도 전혀 문제될 것은 없지 않은가?
3.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탈론에 가담한거지.”
양귀비는 직설적인 그의 질문에 미간을 조금 좁혔다. 영 뜬구름 없는 소리를 하더니 취조하듯 민감한 주제를 들이미는 모습에 기가 찼다. 그러나 그가 언제부터 세심한 배려 따위를 했던 적이 있나. 이렇게 곧장 묻는 모습을 보면 지금껏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나보다. 조심스러운 기세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에 양귀비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가끔은 서로 터놓는 대화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조직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어. 탈론이 협조하겠다고 했지.”
“조직? 오버워치에 반기를 들 생각이었나?”
“그럴리가. 난 내가 가진 걸 다시 되찾고 싶었을 뿐이야.”
퍽 유쾌하게 대답한 양귀비는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닫힌 커튼이 열차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그 사이로 빛이 세어들어온다. 마주보고 앉은 데시와 양귀비의 사이로 미세한 경계선이 그어졌다 사라졌다. 얼굴을 짚고 생각에 잠긴 데시를 바라보던 양귀비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렇군.”
이윽고 이어진 대답은 단순했다. 이래서야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지 않나. 더 묻지는 않아? 양귀비는 데시가 물었던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이에 데시는 고개를 젓고 천천히 등을 의자에 깊숙히 묻었다. 오래 된 좌석이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왜, 막상 물어보자니 겁나?”
“그런거 아냐.”
데시는 생각했다.
나는 이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솔직히 답하자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얼토당토 않는 답변이더라도 상관없을 터였다. 그야 눈앞의 존재는 자신의 환각일 뿐일테니까.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인물이 하는 말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제3자 보기에 그는 혼자 객실에 앉아 독백을 늘어놓는 꼴일테니 행인이 지나가다 우연히 시선을 객실칸 안을 들여다본다면 아마 데시를 미친놈이라 생각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데시는 양귀비가 임무 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증거로 그의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 안에는 양귀비가 생전 피우던 상표의 담배 케이스가 담겨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기라도 하듯 그는 저도 모르게 담배 케이스가 담긴 가슴 주머니 근처에에 손을 올려두었다 곧 내려두었다. 그러나 양귀비는 이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담배, 원래 피우지 않았던 것 같은데.”
“......”
“왜. 내가 그리워지기라도 했어?”
“아무래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지.”
양귀비는 그에게서 긍정의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과 표정이 미세하게 우수에 찼음을 눈치챘다.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쩐지 가슴께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이제와서.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거야?”
“아마 그렇겠지.”
“그래.”
카발리에르 데시는 지금껏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가슴께를 펴 고개를 들어올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내 포기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종종 생각나겠지. 내 고향처럼.”
최초의 논제로 돌아가보자, 카발리에르 데시는 양귀비에게 어떠한 의도로 질문하였는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조직의 존재가 지금 그에게 중요한 대답인가? 아니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텐데. 그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개죽음은 그저 불운과 사고에 의한 것이고 탈론조차 억울한 누명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카발리에르 데시가 알고 있는 양귀비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는 상황에 흘러가며 자신을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거짓으로라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후회했다. 차라리 일찍이 불편할지라도 캐묻고 그에 대해 알아갔다면 결말을 바꿀 수 있었을까? 이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후회는 언제나 결이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기억이 된다는걸 양귀비는 모를 것이다. 데시에게 상실이란 본래 시간이 지나면 잊고 살아도 아주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눈 앞에 불쑥 떠오르는 성가신 것이었다. 그럼 그 기억을 누르기 위해 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아부어야했고 그는 어느새 이 행위에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가는거야? 베네치아.”
데시는 사건 발생 이후 그의 향수와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는데 능했다. 예민한 성질을 가진 양귀비도 쉬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데시는 대답 대신 양귀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안쪽 주머니에 담긴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해져 손가락으로 좌석 쿠션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렸다. 눌러두었던 것이 파도처럼 울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흐름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밟지 못할 땅을 향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이 미미한 고양감과 오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 함께하는 이 열차 여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바란다는 사실도.
4.
돌아갈 거지?
….
넌 돌아갈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오래 머물 수 없을테니까.
데시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실 카발리에르 데시 본인도 알고 있는, 아니, 알다 못해 스스로가 가슴에 박아두다시피 굳게 내린 답이었다. 그 땅에는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발 들이기도 전에 쫓기거나 도망해야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배신자의 낙인이란 어떤 각도에서 본들 이방인보다도 질 나쁜 것이므로. 다만 그러한 낙인이 제게 퍽 어울리지 않던가…. 왼쪽 가슴이 아리다 못해 갈기 찢을 정도로 서늘했기에 데시는 한 손으로 제 가슴께를 꾹 눌러냈다. 마음이, 심장이 이쯤에 있던가? 과거를 과거라 칭하며 등을 진 뒤로 그리움은 매 때 가시의 모양새를 한 탓에 데시는 갗에 댄 손가락을 더 깊숙 누를 수도, 섣불리 빼낼 수도 없었다. 대신 그저 고개 돌리는 수밖에는.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지. 내가 어디로 향하든…. 자네와는 상관없을 일 아닌가. 어디든 따라오려 들 것도 아니면서.
데시는 아무 의미 갖지 못할 일임을 알면서도 구태여 냉정함을, 거리를, 벽을 표방했으나 그저 허술한 모순이었다. 기억은 목소리로부터 시작해 머리카락 끝 감촉으로 잊히는 법이라, 데시는 언제고 양귀비가 자신을 따라오기를, 그저 오래록 남아 저를 괴롭히기를 바랐으므로.
내게 더 묻고 싶은 건 없나?
없지. 네가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모를까.
물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물론.
너는 곧 나이니까. 아니, 내가 곧 너인 건가. 양귀비는 데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바늘처럼 손등을 쿡 찌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섰으나 데시는 서늘함 그 외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너야. 양귀비가 재차 말했다. 서늘함이 뼈에 스미며 유령의 모습이 일순 일그러졌으나 데시는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그것은 유령이며 환상이었으므로. 이름만 남은 뼈대에 한 조각 기억에 불과한 얼굴 가죽과 망상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융해된 미련의 덩어리였으므로. 그러니 너는, 나로 이루어진 너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물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답만을 늘여놓을 것이다. 내가 필요한 말을 건네고, 내가 아는 것만을, 반복하여서…. 혹은 아예 입을 다물겠지. 철도 끝에 산을 깎은 터널 입구가 닿자 사위가 어두워졌다.
나는,
자네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맴돌거나 어둠에 녹아들었다. 양귀비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리라 여겼으므로 데시는 무엇도 묻지 않고자 했다. 알지 못한, 알지 못하는, 영영 알 수 없는 이를 그리워한들 높이 쌓여 부패하기만 더 하겠는가? 터널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시 객실에 빛이 쏟아졌다. 그새 암전에 순응한 눈이 부신 탓에 데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을 지껄이는 일이 평생 업이었음에도 꼭 비통함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네를 잊고 싶어. 진심으로.
거짓말.
거짓말. 양귀비가 말했다. 고, 데시가 생각했으므로 양귀비가 그렇게 말했다. 데시는 고개를 들었다. 눈과 입을 모두 휜 채로 선명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뇌리에 꽂혔다. 수 초가 지나도록 양귀비는 웃었다. 데시가 기억하는, 그러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5.
마음이란 건 꼭 물과 같은 성정을 지니지 않았나.
데시는 생각했다. 어쩌면 소리 내어 말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양귀비가, 네가 손을 뻗거나 미소를 띠웠을 뿐인데도 나를 찌르고, 헤집고, 뒤틀어 딱 너 하나만이 맞아떨어질 만큼의 모양을 만든 것 아니겠어…. 너의 그 알 수 없는, 알지 못하는 웃음 한 순간을 나는 평생 가슴에 담아 살아가겠지. 데시는 양귀비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살덩이가 있다고 여긴 허공에 손끝이 닿자 그곳부터가 흰 먼지처럼 바스라져 형태를 잃어갔으므로 데시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참 자네를 몰라. 애초에 넌 알려줄 생각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말하는 양이 퍽 편안해 보였으므로 데시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한 적 없었음을 알았다. 새삼스럽게도. 날이 밝은 뒤로 먹거나 마신 것 하나 없었음에도 입안에 씁쓸한 향이 감돌았다. 내가 일찍이 나의 진심을 알아 네게 전했다면 무엇이라도 변했을까? 아니, 무엇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물이라지만 너의 마음은 그보다도 단단한 것이라서, 이 따위 불완전하고 연약한 감정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서. 데시는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않았다.
…마지막이잖나. 말해줘.
그러므로 그런 말에는 꼭 물기가 어렸다. 무엇을 물은들 저것은 대답하지 못한다. 않는다, 는 것을 알았으므로. 나는 너에 대한 것이라고는 진짜 이름 한 철자조차 알지 못해서. 내가 거짓을 업으로 삼았다면 너는 숨어드는 일을 생으로 삼은 자라서. 너는 내가 바라는 답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답을, 나를 네 목소리로 읊을 것이다. 그러나 데시는 멈추지 않았다. 너무 먼 길을 떠나기로 다짐한 탓이었다.
모두 끝장이 난다면, 무로 돌아가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다면 말이야.
자네는 무엇을 하고 싶나? 그리고 양귀비는 오래도록 입을 닫았다.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아내며 오랜 침묵을 애써 지루하지 않게 이어 나가는 동안 데시는 말 그대로 무엇도 하지 않았다. 옅은 한숨이 얼음 같은 침묵의 막을 걷어냈다. 양귀비는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눈이 녹아 비가 내린 듯 물기 가득한 창에 손가락을 대었다. 유리는 무엇도 비추지 않았다.
…이젠 지쳤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지…. 새 이름으로, 새 모습으로, 처음 발 닿아보는 곳에서.
멀거니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무원의 것일 구둣발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며 온 복도를 돌았다. 저희 열차는 곧 파리, 파리역에 도착해 오 분간 정차합니다….
그래, 파리도 나쁘지 않겠다.
그리고 데시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체가 점차 속도를 낮추어 느려지다 움직이기를 멈추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데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역순으로 타이를 매만지고, 겉옷을 어깨에 걸치고, 머리 위에 올려둔 짐을 내렸다. 문을 열었다. 머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승무원이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무슈.
데시는 뒤돌지 않았다. 눈이 그쳤으므로 발자국이 오래도록 형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