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ission @GU_CU__






때는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둔 평일의 아침이었다.
야외 플랫폼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10살의 소년, 로렌스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눈을 피해 껑충껑충 뛰었다. 기차역의 청소부들이 곁가지로 눈을 깨끗하게 치워둔 덕에 두 모자는 편안하게 눈을 감상할 수 있었다.
10시 20분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거의 30분 가까이 남았다. 엄마는 로렌스의 장갑 낀 손에 입김을 불며 그러게 너무 일찍 나오지 않았느냐고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모자의 입술엔 따스한 미소가 계속 감돌았다. 마법처럼 등장할 열차가 과연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설원을 달리는 열차에서의 환상적인 하룻밤.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커다란 포스터에 그려져 있던 열차의 호화로운 객실 풍경을 로렌스는 감탄하며 쳐다봤다. 아빠가 짠, 하고 보여준 세 장의 티켓도. 로렌스는 너무 들떠서 밤에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열차에서의 파티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시작이지만, 로렌스는 엄마를 졸라 보다 일찍 순환 열차에 올라타기로 했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안내문에서 가능하다고 했기에 엄마는 넓은 객실에서 조용하고 여유롭게 눈 내린 풍경을 즐길 수 있겠다며 좋아했고, 아빠는 업무 탓에 미리 함께 올라탈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로렌스는 그마저도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 엄마랑 실컷 즐기고, 아빠한테 잔뜩 자랑해야지.
그렇게 7번 승강장에 우뚝 섰을 때다. 엄마는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봤다. 분명 열차 시간까지 한참 남았는데, 승강장 앞 벤치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건지 손날이고, 귀고, 코끝이고, 뺨이고 죄 불어 터질 듯 빨개서,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를 흘긋거렸다. 사실 그게 아니라도 무척이나 눈에 띄는 인상착의였다. 왜인지 창백하다는 표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붉은 머리카락에 멋들어진 군복. 반질거리는 검은 가죽 장갑과 질끈 동여 묶은 군화는 어린 남자아이가 보기에 열광할 만한 것이니까. 게다가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별 감흥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라니! 그런데 의아한 구석이 하나 있었다. 멋있는 사냥총이나 군장이 잘 어울릴 법한 남자의 한쪽 옆구리에 엄청나게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상자가 하나 껴 있다는 것이었다. 금색 리본에 감겨 있고, 녹색과 빨간색으로 마감을 한 기프트 박스….
“어드벤트 캘린더네.”
엄마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렌스는 눈을 빛내며, 이제 대놓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저런 멋진 사람이 이제 24일 칸 하나만을 남겨둔 어드벤트 캘린더를 안고 있는 걸까? 과연 오늘은 어떤 선물이 나왔을까. 마지막 물건은 대체 무엇일까?
“안녕.”
목석처럼 앉아 있던 남자가 눈을 맞추며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로렌스는 깜짝 놀랐다. 하얗게 질린 남자의 입술에선 이제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
“안, 안녕하세요.”
“나는 로건 에클라인저.”
너는? 하고 그가 덧붙이자, 로렌스는 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차렷 자세로 외쳤다.
“로렌스 밀즈입니다!”
“씩씩하네. 너도 크리스마스 열차 타려고 기다리냐?”
“네!”
발음이나 말씨가 여느 고상한 사람들과는 달라서 로렌스는 더욱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의 엄마는 달랐던 모양이다. 대화가 길어지자 무언가 안 좋은 느낌이라도 받은 것인지, 실크 장갑을 곱게 낀 손이 로렌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살짝 휘청거리는 아이를 보고 남자는 무해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열차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 기대된다.”
“그래요? 근데 왜 안 웃고 계셨어요?”
로렌스, 하고 그의 엄마가 속삭이듯 주의를 줬다. 뭔가 무시무시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예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안타깝게 된 일이다. 남자는 일부러 늘어져라 한숨을 내쉬며 어드벤트 캘린더를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만 하루 정도 와이프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우울해서…. 밤에 같이 캘린더 칸 열어봐야 하는데….”
로렌스의 머리 위로 어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남자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좋게 바꾼 듯 보였으나, 어쩐지 로랜스는 멍해지고 말았다. 뭘까, 저 아저씨. 되게, 되게 깬다….
***
열차의 도착을 알리며 종이 울렸다. 승강장의 사람들이 차례차례 열차에 올라섰다. 가족, 연인 단위로 탑승하는 사람들 틈에서 로건은 홀로 외로이 짐 가방을 들어 올렸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열차였지만 내부는 꽤나 놀라웠다. 로건은 잠시 학교를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 짐도 내려놓지 않고 발발거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식당 칸, 우아한 와인 바, 로렌스라는 소년과는 휴게실에 장식된 커다란 트리 앞에서 다시 만났는데 어쩐지 아까와는 달리 어머니 쪽이 조금 더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승무원이 준 기념품이라며 루돌프 썰매가 상감된 금속 키링을 건네어 주었다. 로건은 와이프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제야 비로소 객실로 향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게 로렌스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미래의 군인 혹은 미래의 군인 페티쉬 보유자로의 자질이 보이는 소년이다.
짐 가방을 냅다 펼쳐 둬도 바닥이 한참이나 남는다. 아니, 장성한 성인 남자 셋 정도는 쾌적하게 뒹굴 수 있을 것 같은 너비다. 로건은 입을 쩍 벌린 가방에서 두툼한 외투 한 벌을 꺼내어 덮고서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와, 씨발. 얼어 죽을 뻔했네. 옛날엔 혹한기 훈련 어떻게 했지? 애초에 영국의 1월은 혹한기로도 쳐주지 않는 것이 세계 군인의 보편적인 마인드라곤 하지만, 눈 오면 좋다고 뛰는 강아지처럼 혹한기 훈련을 끝냈던 로건에게 오늘 일은 충격적이었다. 고작 몇 시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데. 빨갛게 언 코끝을 외투로 문지르며 그는 부르르 떨었다. 이건 다 군용 외투를 입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두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각별한 날이다. 종교적인 기념일이자 유명한 낭만의 휴일이라서도 있지만, 로건의 사랑스러운 와이프 이브 에클라인저의 생일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이다. 에클라인저 부부는 고맙게도 이브 날 태어난 아들에게 이브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 덕에 로건은 밖에서 와이프라며 그의 이름을 편하게 말하고 다녔다. 남들이 보기에 로건은 아주 평범한 가장이자 남편이었다. 원래 프라이빗한 관계란 멀리서 관조할 때 대체로 다정다감하게 보이는 법이다.
아무튼,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두 사람은 열차에서 생일을 보내기로 했다. 이브의 생일마다 해외여행, 국내 여행 가리지 않고 어디든 잘 갔지만, 열차에서 며칠씩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눈이 오는 풍경을 느긋하게 흘려보내며, 아늑한 객실에서 붙어 있는 상상을 하자니 입술에 절로 미소가 매달렸다. 열차 식당에서 먹는 식사도 낭만적일 것 같다. 와인 바에서 술을 한 잔씩 하고 가볍게 춤을 추면 얼마나 재밌을까? 이브는 안 출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이 뻗쳐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옛날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타는 곳이 거기네. 나 휴가 나오면 네가 마중 나와 주던 거기.’
아주 오래된 일이다. 로건이 아직 군부대에 있고, 이브는 대학을 다니던 때. 그때 이브는 로건에게 작은 마음조차 없었고, 로건은 그런 그를 사랑하는 한편 그보다 강렬히 죽이고 싶어 했다. 미숙했던 시기를 엉망진창으로 보낸 덕인지 서른 즈음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의 두 사람은 놀랍도록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로건은 눈이 아주 많이 오던 옛 휴가 날을 떠올리며 침대서 턱을 괴었다.
‘진짜 말단 때는 휴가도 많이 없어서, 가끔 런던 나오는 거 네가 마중 안 나와 주면 엄청 서러웠는데.’
‘웬만큼은 나가줬잖아.’
‘응.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와줬지. 너 그때는 나 안 좋아했잖아.’
로건이 떠보듯 고개 돌려 쳐다보자, 이브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책을 읽거나, 자려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입 딱 다물고 ‘뭐,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식의 반응. 그런 모습마저도 익숙했기 때문에 로건은 혼자 웃으며 마저 말했다.
‘추억이다. 늘 혼자 왔었는데, 이젠 너랑 같이 타겠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창문으로 너 찾는 재미도 있었는데.’
‘...’
‘가끔 보니까, 그냥 얼굴만 봐도 막 찌르르한 게 있었거든. 또 너 엄청 근사하게 입고 나왔잖아. 플랫폼에서 키스라도 해주면 진짜 기분 막-’
‘그렇게 그리우면 아예 군복을 입고 타지 그래.’
‘응?’
미심쩍어 눈을 동그랗게 뜬 로건을 이브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러고 있었다.
‘너 마중 나가는 것처럼 해줄 테니까.’
‘진짜로?’
‘어. 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그렇게까지 같이 있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예전엔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보채더니, 이제 그것도 질렸나 보지?’
괜히 기뻐했다. 연인 사이의 달콤한 상황극이 아니라, 살벌한 함정이었다. 로건은 이브의 팔을 쭉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되는 대로 입을 털었다.
‘아이…. 군복 입는 건 좋은데, 네 생일을 그렇게 보내긴 좀 아깝잖아. 이번엔 지금 상황으로, 어, 군대 갔다가 돌아온 남편 맞이해 주는 와이프 컨셉 안 될까? 응, 응? 그걸로 하자-.’
‘너 군인 계속했으면 지금 나랑 이러고 있지도 못했어.’
‘알지-! 그걸 왜 몰라. 나도 이제 군인 별로 안 하고 싶어.’
그건 약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브의 눈이 갸름하게 좁혀지다 못해 거의 실처럼 가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로건은 생각했다. 이참에 로건은 조금 더 떼를 써보기로 했다.
‘내가 군 정복 입은 건 좋아하잖아. 휴가 나온 군인 남편과 뜨거운 키스, 아, 좋잖아. 너무 좋다-. 그러고 열차에서 와인도 한 잔하고, 나랑 새벽에 춤도 추자. 이번엔 발 안 밟을게.’
‘일부러 밟은 거였다고?’
‘아니! 연습했단… 뜻이지. 혼자.’
노력이 가상한지 이브의 표정이 슬슬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원래 그렇게 긴장이 풀려가는 중에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말이 많은 사람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
‘이참에 좀 애틋하게 하루 떨어져 있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열차 타고 오게. 하루 못 봤다가 내가 군복 입고 열차에서 딱 내리면, 진짜 실감 날 것 같은데? 와, 너무 재밌겠다!’
로건은 자신이 미리 열차를 타고 와 리얼리티를 살리자는 것… 에 포인트를 두고 말했다.
‘그게 재밌어?’
하지만 이브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루 떨어져 있는 게 대관절 뭐가 재미있느냐고 무표정하게, 덤덤하게 묻는 그를 앞에 두고 로건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브는 이러다가도 곧잘 화를 내곤 한다. 아니면 주먹을 휘두르거나.
‘…………파, 파병 갔다 돌아온, 남편, 그런… 느낌으로다가….’
‘…….’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브는 짜증을 부리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숙소에 머무는 건 안 돼. 열차 내에서 하루 숙박하는 정도는 어디 해보던가.’
‘숙소 잡는 건 안 되는데, 왜 열차 숙박은 돼?’
‘열차에 네가 외도 상대를 태우면 흔적이 남을 테니까.’
아주 잘,
이라고 덧붙이며 멍청하고 한심한 놈 다 보겠다는 듯 쳐다보던 눈길을 로건은 선명하게 떠올렸다. 아주 잘.
로건은 그 앞에선 입도 벙긋 못한 주제에 뒤늦게 혼자 구시렁거렸다. 대체 지 생일날, 내가 왜 바람을 피울 거라고 생각하는지…. 전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럴 때 보면, 이브는 사랑에 한해 참으로 보수적인 게 맞다. 지고지순하고, 맹목적이고, 바보 같을 정도로 순수하고…. 자신도 사랑하는 걸로는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로건이었지만 이런 부분은 확실히 본받아야 했다. 로건은 가끔 그에 비해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 손과 자유를 다 바쳤음에도 이브 앞에서는 유독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자존감과 자아존중감이 멀쩡한 상태에서는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우리 부모님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로건은 이제 외투와 함께 침대 이불까지 돌돌 몸에 감아 따끈따끈하고 느슨해진 머리로 생각했다. 아빠는 엄마를 초라하게 만든 적이 없다. 아빠가 더 초라한 사람이라 가능했던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빠는 엄마를 제정신으로 살 수 있도록 놔뒀다. 그러니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구석에 몰린 유년기만은 벗어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아빠가 이브보다 착한 걸까? 아니면, 이브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엄마가 건강해서 일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다면 아빠도 이브처럼 했을…
“어? 어!”
로건은 예쁜 크리스마스 카페트가 깔린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이불을 몸에 돌돌 감은 채로 펄쩍 뛰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옴짝달싹 못 한 채 처박힌 로건은 얕게 앓는 신음을 흘리더니, 갑자기 부자유한 두 팔과 다리를 바둥거리며 외쳤다. 그랬구나! 엄마가 몸이 약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를 못해서! 그래서 아빠가 제정신이었던 거야! 난 건강해서 이브가 자꾸 의심하는 거고! 유레카!!!
누군가 들었다면 이게 뭔 소린가 싶을 테지만, 로건은 뿌듯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유레카를 외쳐보았기 때문이다. 왜인지 똑똑해 보이지 않는가? 유레카!
***
열차는 하루를 순환해 런던으로 돌아간다. 아침 10시면 사랑하는 와이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확하게 평소 로건이 내리던 그 기차역에서 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해 나오는 바람에 자신의 탑승 장소만 봤던 까닭이다. 어제 있었던 그 일 때문인지 이브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빠 보였다. 빨리 꺼지라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시계도 보지 않고 나온 탓에 플랫폼에서 하릴없이 멍을 때리다 보니 너무 추웠다. 그래서 로건은 일단 바에 가서 위스키 한 잔을 마셨다. 누더기가 된 객실 이불은 세탁을 맡기지도 못했다. 이브가 의심할 것 같아서.
혼자 시간을 죽인 끝에 드디어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여러 곳을 한량하게 들락거리던 로건은 아예 바에 정착한 상태였다. 빈 위스키 잔을 붙든 그가 창밖을 노려봤다. 심각하게 콧잔등을 찌푸리고 있지만, 실은 그냥 심심한 것뿐이었다. 이브는 대체로 맞는 말을 한다. 이번에도 그렇다. 정말 재미가 하나도 없네. 창밖으로 어둠 속에서 송이송이 예쁜 눈이 펑펑 내리며 반짝이는데 별로 예쁘지도 않고, 지루하기만 하다. 이브가 없으니 술을 계속 마실 수도 없고, 이브가 없으니 다른 사람과 말을 트기도 뭣하다. 나이가 좀 있는 어머니나 유부녀라면 봐줄 테지만 애초에 그런 사람은 가족 단위로 탑승해서 웬 군복을 입은 모르는 사내와 도란도란 이야기해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드벤트 캘린더를 먼저 까기도 좀 그렇고. 수학 문제지도 안 들고 왔는데….
“아….”
나직한 신음과 함께 바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당장 이브만 있으면 해결될 일들인데,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로건은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은 분명 앉아 있는데 시야가 딱 맞았다.
로건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너였구나.”
이름이 뭐랬더라. 로렌스? 어린애가 이 밤에 혼자 바에 들어와도 되는 건지, 바텐더를 돌아보는데 정갈한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로렌스에게 주스를 건네고 있었다. 그렇구나. 되는구나. 로렌스는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쪽 빨아 마셨다.
“뭐해요?”
로건은 말갛지만, 왜인지 모르게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말하면 알겠니?”
“알 지도요.”
“와이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 마음을 네가 알겠냐? 하는 나름의 비아냥이었으나, 로렌스는 공작새가 날개 펼치듯 가슴을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알죠. 안 그래도 우리 엄마, 지금 아빠랑 통화 중이에요.”
“아하?”
“30분째예요.”
“그래서 혼자였구나.”
“네. 근데 아저씨도 전화하실 거면 심심해도 가만히 있을게요.”
아이가 의젓하게 옆자리에 앉아서, 로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쉽사리 전화 버튼에 손이 가질 않았다. 로렌스의 엄마처럼 30분 이상의 열렬한 통화야 당연히 가능하지만, 애초에 전화를 걸어도 되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로건은 괜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화면을 껐다, 켰다 하기를 반복했다. 저녁이 되도록 메시지 한 통 오질 않아서, 아직까지 화가 나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그런 그를 로렌스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있잖냐.”
로건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아이에게 물었다.
“너희 엄마는 무슨 통화를 30분씩 하시냐.”
“아저씨랑 비슷하겠죠.”
“로건.”
“로건 아저씨랑 비슷하겠죠.”
“하아….”
“알았어요. 알려 드릴게요.”
빨대로 주스를 빨아들인 로렌스가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아빠를 ‘울 애기’라고 불러요.”
“오….”
“아빠가 엄마보다 어리거든요.”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머리는 맑아지는 것 같았다. 로건은 ‘원래 이브는 선 연락을 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곧장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긴장은 돼서, 신호가 가는 짧은 사이 마른침을 두 번이나 삼켜댔다.
[여보세요.]
소리가 약간 작았다. 볼륨을 더 키우고 싶었지만, 혹시나 로렌스에게 들릴까 싶어 곤란했다. 로건은 고개를 돌리고, 휴대폰을 귀에 더욱 바짝 가져다 붙였다.
“나야. 지금 뭐 해?”
[군부대에서 이 시간에 전화 거는 게 가능해?]
“아….”
컨셉을 지키자는 건지, 삐져서 이러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로건은 날 때부터 멍청했고, 앞으로도 쭉 그러할 머리를 열심히 괴롭히며 답을 쥐어짜 냈다.
“모, 몰래 나왔어.”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로렌스를 흘긋거리곤 마저 덧붙였다.
“우, 우리 애기 보고 싶어서….”
로건은 잠시간 침묵이 흐르는 동안, 1초에 한 번씩 ‘씨발, 좆됐다.’고 생각했다. 로렌스의 부모님처럼 부부인 것도 맞고, 이브가 자신보다 어린 것도 맞는데 배알도 없는 심장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로건은 뭐라고 더 나불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 크리스마스라고 영화라도 틀어줬나 봐? 요즘 군대 엄청 편하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난 진짜 보고 싶어서….”
[그게 다야?]
스핑크스의 시험이 차라리 쉽지. 로건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너 안아줘야 나도 자는데, 품이 허전하니까 잠이 안 오잖아…. 자장가도 불러줘야 하는데….”
있잖아, 이브. 아직 화났어?
등 뒤에서 허걱,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건은 애써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로렌스보다는 바텐더의 표정이 더 걱정이었다. 자의식과잉일지 몰라도 로건은 원래, 정말로 원래는 이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다. 당장은 이브가 화를 푸는 게 더 중요해서 그렇지. 로건은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 공연히 군홧발로 바닥을 자근자근 짓이기는데 다행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들었다.
[그럼 지금 불러줘.]
“어? 어! 내가 지금 바로 들어가서….”
아, 객실 밖이시다?
그 순간 이브는 생각했다. 사실 화 안 났는데, 좀 더 화난 척해야겠다.
[이 시간에 아직 밖이라고?]
“아니! 아니! 나 객실이야!”
로렌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에게 한 손을 까닥이는 그를 지나쳐 보냈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바텐더가 ‘열차에서 뛰시면 안 됩니다.’라고 작게 소리쳤는데, 타이밍이 별로 늦지 않았음에도 이미 객실을 가르는 문이 닫히고 난 뒤였다. 로렌스는 의젓하게 주스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바텐더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크리스마스 때문에 고생이 많으세요. 저도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어머니 기다리시겠다.
***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열차에 오를 때와는 반대로 엄마에게 들볶여 복도로 나온 로렌스는 데자뷔를 느꼈다. 분명 탔던 곳에 도착하기까진 30분 정도 남았다고 기장이 안내해 주었음에도 복도에는 이미 군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와 있었다. 어제의 그 진상 아저씨, 로건 에클라인저였다. 그는 심지어 탑승할 때와 똑같이 짐가방을 한 손에 든 채였다. 로렌스는 엄마의 치마폭을 당기며, ‘엄마, 저 아저씨도 엄마랑 똑같아.’하고 말했다. 로렌스의 엄마는 남편을 빨리 만나고 싶다며 아침 일찍 꽃단장한 참이었다.
로렌스와 그의 엄마, 그리고 로건은 같은 문을 통해 열차에서 내렸다. 이 역이 출발역은 아닌지라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플랫폼에 나와 있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로렌스는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빠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제의 그 부부를 찾았다. 사랑에 미쳐 이미지를 다 구긴 군인의 아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종아리 옆에 짐을 내려놓은 군인은 두 팔 가득 배우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와이프라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키가 크고 다부진 사내였는데, 그렇다고 엄청 충격이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뭐랄까,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희멀건 사람이 우아하고 아름답기까지 해서 그러려니 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무례하게도,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라고 로렌스는 생각했다. 배우자 앞이라고 다 풀어져서 흐물흐물한 군인 아저씨는 조금 바보 같았고, 남편이라기보단 음…. 개…. 의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말든, 로건은 사랑에 빠진 남자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브를 꼭 끌어안고, 체향을 깊이 들이마시고, 목에 건 인식표를 벗었다. 로렌스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다. 인식표가 아니다. 더 작다. 로건이 손에 쥔 목걸이에서 아주 자그마한 보석이 반짝거렸다.
“못 참고, 어드벤트 캘린더 먼저 열어버렸어. 백화점에서 이거 고르고, 한 달 동안 모르는 척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로건은 루비가 반짝이는 목걸이를 이브의 새하얀 목에 걸어주며 뭐라 말하기 모호한 낯으로 웃었다. 한창 군복을 입고 다닐 적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생일 축하해, 여보. 존나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잖아.
그리고 그건 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는 그를 사랑하기 전엔 보여준 적 없는 수많은 표정 중 한 가지를 보여주며 부드럽게 입매를 올렸다. 배우자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미소에 아니나 다를까 로건이 호들갑을 떨며 열 번, 스무 번 말했다. 예쁘다…. 너 진짜 존나 예뻐…. 와, 어떻게 이렇게 예쁘지? 이브는 로건이 제발 1절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역에 멈춰 선 열차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배우자를 보느라 이제야 처음 열차에 관심을 준 자신이 약간 웃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