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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무수히 이어지는 은하. 목적지 없이 우주를 달리는 열차는 오늘도 그들에게 새로운 행성을 보여주기 위해 시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달린다. 이전에 갔던 행성에서 있던 일을 회상하며, 목적지 없이 달리는 이 열차가 다음은 어떤 행성으로 데려다줄지를 기대하듯 말을 주고받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우주는 끝없이 넓었고, 그 눈부신 푸른 별이 우주라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나아가는 이상 이 우주에 끝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일은 없었다. “다음 행성은 조금 따뜻하면 좋겠어….” 영원한 겨울의 별에서 따뜻함을 바란다고 해서 찾아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셀라는 심해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우주는 끝없이 넓었고, 가능성은 그처럼 무한하다. 언제나 그렇듯 둘밖에 없는 열차 안에서 나누는 실없는 대화. 닭꼬치의 소스는 매콤한 칠리소스가 좋은지, 짭짤한 소금이 좋은지 따위의 토론을 나누던 도중, 커다란 종소리가 열차 내부를 울렸다.

 

 정각마다 울리는 시계탑의 종소리와 닮았지만, 그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차 내부까지 종소리가 울리고, 창밖으로 보이던 무수히 이어지는 우주의 풍경이 새하얀 눈 뒤덮인 설산으로 변한다. 무언가 바뀌었다고, 그걸 깨닫기 전 안내방송에서 익숙하게 들었을 목소리가 기계 노이즈 없이 귀를 파고들었다.

 

“티켓 확인하겠습니다.”

 

 열차 기관사가 입을 법한 반듯한 제복과 얼굴을 가리듯 눌러 쓴 검은색 모자. 기관사조차 없이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열차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승무원이었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했다. 열차 바깥은 눈 덮인 설원, 열차 내부는 처음 보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고급스럽게 흔들리고 그 아래에서 처음 보는 이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즐겁게 떠들고 있다. “티켓 확인하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리기 전, 다시 한번 들려온 번듯한 목소리. 두 사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손에 처음 보는 티켓이 있는 것을 눈치챘다.

 금박이 박혀있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티켓. ‘환영합니다. 당신을 단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합니다.’ 수기로 적은 듯 화려한 초대 문구조차 금색의 잉크로 쓰여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출발지는 지워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목적지에는 마찬가지로 금색의 잉크로 된 선명한 문장이 쓰여 있다. “손님.” 번듯한 목소리로 재촉하듯 말을 해온 승무원에게 시선을 주고, 두 사람은 가지고 있던 티켓을 내주었다. 티켓을 끊고, 남은 것을 돌려주는 반복적인 행위. 승무원은 모자를 조금 더 아래로 눌러 쓴다. 처음으로 일어난 열차의 이상 현상에 놀란 이도,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이도, 동시에 시선이 닿는다.

 

“저희 초대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파티는 오늘 정각, 커다란 종소리가 세 번 울리면 끝납니다. 준비해둔 것이 많이 있으나, 모쪼록 느긋하게 저희가 준비한 파티를 즐겨주세요. 다만 파티를 참석하기 전 알맞은 드레스코드가 필요할 것 같군요.”

“드레스코드?”

“네. 저희가 준비한 파티는 정장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혹여 준비한 옷이 없다면 드레스 룸에 있는 옷을 빌려드리고 있습니다. 네 번째 객실에 있으니, 환복 후 파티를 즐겨주세요.”

 

 준비된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안내를 도와준 승무원은 이제 되었다는 듯 중세의 귀족처럼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있던 자리가 2인용 객실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창밖은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을 것처럼 눈이 내리고, 문이 닫힌 객실 바깥에서는 여러 사람의 떠드는 목소리와 고풍스러운 레코드의 음악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처음 마주한 이상 현상에 호기심 눈 빛내는 이가 손에 쥔 티켓을 흔든다. 출발지에는 지워진 듯 글자가 보이지 않았고, 목적지에는 금색의 잉크로 ‘영원의 별’이라는 글자가 화려한 수기로 쓰여 있다.

 

“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즐길까?”

“태평한 자식….”

 

  

 위험할지도 모를 상황임에도 태평한 낯짝으로 제 호기심 먼저 채우려는 모습에 질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차라리 주변을 둘러보는 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질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태평한 낯짝으로 실실 웃는 아셀라에게 심해는 이 이상의 질책을 그만두었다. 긴 시간 함께 해온 경험으로서, 말을 더해도 입만 아플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심해는 아셀라의 성격을 질색하고 있었지만, 고작 말 하나로 고쳐먹을 성격이었다면 현재라는 미래에서 서로의 곁에 서로가 없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했다.

 받은 적 없는 초대장, 눈이 뒤덮인 풍경, 시계탑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은 종소리,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귀빈이 모인 파티. 도저히 정상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모든 게 꿈이라는 환상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는 특히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저 태평한 태도는 안일하기 짝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흑백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새하얗게 눈이 뒤덮은 풍경을 뒤로하고 이전보다도 떠들썩해진 객실 바깥을 나선다.

 

 달칵, 하고.

 객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창 바깥에서 모든 시작을 알리듯 커다란 종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01.

 마치 처음부터 이런 구조를 했다는 듯 열차 내부는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호화롭다. 수백 개의 보석이 박혀있는 화려한 샹들리에, 새것처럼 빛나는 은으로 만든 식기, 오래전 영화에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디자인, 초짜가 보아도 비싼 값어치가 나올 것만 같은 장식. 지겹게 보았던 먼지 쌓인 낡은 열차가 탈바꿈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바뀌었지만, 구조만은 바뀌지 않아 이곳이 몇 년이고 그들이 지냈던 열차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 사실에 흥미롭게 눈을 반짝인 아셀라가 심해에게 발길질을 당한 것도 매번 있는 익숙한 일이었다.

 마치 중세 귀족이라도 되는 듯 화려한 파티복을 입은 탑승객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리며 무리를 만들고 파티를 즐기고 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허공에서 흔들리는 천 자락, 얼굴이 없음에도 들려오는 목소리. 고풍스러운 배경 위로 그려진 기괴한 광경.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음 역에 왔다던가?”

“그럼 적어도 열차 안은 아니었겠지….”

“그런가? 으음…그럼 뭘까. 다른 장소랑 다르게 여기 있는 인간들이 기괴한 모습을 하는 이유도 궁금하고….”

“인간들….”

  

 자신들조차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는데, 저걸 인간이라는 분류에 넣을 수 있을까. 심해는 입에서 나오려던 말을 삼켰지만, 한발 먼저 심해의 의아함을 알아챈 아셀라는 닫혀있던 드레스 룸의 문을 열면서 부가 설명을 덧붙였다. “다들 본인을 인간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같거든.” 존재의의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따위의 철학적인 문제로 지금 머리를 앓고 싶지는 않았기에, 심해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대신 문이 열린 드레스 룸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무도회장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멀리서 울리던 오케스트라의 감미로운 연주 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드레스 룸 안에는 수백 가지의 옷이 질서정연하게 걸려있었고 그곳의 관리자로 보이는 마담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산양을 모티브로 한 듯 크고 화려한 에스코피옹을 쓴 드레스 룸의 관리자는 “바쁘다, 바빠!” 그런 말을 반복적으로 외치며 혼자서 내부를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정작 옷을 관리하며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더욱 기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전혀 안 바빠 보이는데 말이야.” 웃음 서린 아셀라의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관리자는 뛰어다니던 걸음을 뚝 멈춘다. 여전히 발이 보이지 않아 그저 허공에서 녹색의 드레스 자락만이 화려하게 흔들린다. 사과하라고 재촉하기 위해 시선을 주지만, 그보다도 빠르게 커다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관리자는 손가락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팔을 길게 뻗었다.

 

“옷이 그게 무슨 꼴이예요! 그런 거지 같은 꼴로 여기를 돌아다니신 거예요? 정말 수치스러워요…! 얼른 그 흉측한 천 조각은 버리세요. 제가 당신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준비해드릴게요.”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분이 해야 할 것 같은데?”

“거지 같다는 소리를 다 들어보네….”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어조로 관리자는 지금 두 사람이 얼마나 거지 같고 흉측하고 옷이라고 부르기도 수치스러운 걸 입고 있는지 열렬한 토론을 늘어놓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금박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탈의실에 둘을 각자 밀어 넣었다.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조잡하고 거친 대응이었다. 아셀라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속으로 집어넣은 채로 웃었고, 심해는 그 정신없는 언동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쳤다. 다행인 점은 탈의실에 둘을 밀어 넣자 관리인은 더 이상 옷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토론을 늘어 두는 것을 그만두고 정신없이 옷이나 장신구 따위를 찾아다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둘은 관리인이 넘겨준 옷을 입고 왜 관리인이 자신들의 옷을 보고 막말을 했던 것인지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이해해주기로 했다. 관리인이 골라준 것은 마치 처음부터 각자의 것이었다는 듯 둘에게 잘 어울리는 세련되고 화려한 옷을 골라주었다. 그래도 역시 뱉었던 막말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 정도의 센스가 있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때. 잘 어울려?”

“그럭저럭….”

“에이, 또 솔직하지 않게 굴고. 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심해도 그렇지?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혼자 대화할 생각이면 왜 물어본 거야….”

 

 관리자는 녹색 드레스를 만족스럽게 흔들며 이제 파티를 즐길 자격이 충분하다고 콧노래를 부르고 두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거의 쫓겨나듯 드레스 룸 바깥으로 나선 두 사람은 처음 입어보는 화려한 파티복이 어색해 구두코로 바닥을 가볍게 친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어.” …정확히는 아셀라를 제외하고. 처음 입어보는 옷이라 다소 입혀진 느낌은 있었으나 금방 적응한 듯 기분 좋게 주변을 둘러본 아셀라가 발걸음 향한 곳은 파티의 메인 이벤트라고 부를 수 있는 무도회장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울리지 않는 의상으로 열차 내부에서도 이물질처럼 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야 열차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02.

 

 가벼운 첼로 소리가 요정처럼 무도회장을 뛰논다. 어느 내실보다도 화려하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을 내고, 그 아래에서 화려한 파티복이 저들끼리 호흡을 맞추어 왈츠를 춘다. 멀리서 들렸던 연주 소리는 무도회장 중앙에 있는 악단이 연주하는 소리인지 전문적인 악단처럼 일사불란하게 다양한 악기가 혼자서 움직인다. 유일하게 피아니스트만이 실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다른 탑승객처럼 화려한 연미복의 검은 천 조각만이 흔들릴 뿐이었다. “다들 즐거워 보인다. 저기 봐, 처음 보는 음식도 있어.” 모두가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다는 귀여운 성격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는 아셀라는 단순히 이 돌연 나타난 열차의 이상 현상에 호기심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구김살 하나 없이 밝고 사랑스러운 곡조,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 화려한 내부,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흠 없이 완벽한 풍경이다.

 

“춤춰본 적 있어?”

“있겠냐….”

 

 

 무도회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춤이지만 어느 쪽도 살면서 춤을 춰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춤이라는 문물에 접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동행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심해는 행복하게 춤추는 이들을 뒤로하고 화려하게 음식이 차려진 식탁으로 향했다. 식사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관심사로 두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는 것에 호기심을 줄 정도의 관심은 있었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을 둘러보며 걸으면 그 뒤를 아셀라가 따른다.

 양파와 단호박을 크림처럼 곱게 으깨 만든 옥수수 빛깔의 수프. 바삭바삭한 파이 크러스트 아래로 포슬포슬한 고기와 매콤한 소스가 화끈하게 볶아진, 속에 반숙한 새알을 집어넣은 스파이스 미트파이. 사과 통짜에 속을 스코프로 조금 파내고 안에다 땅콩과 호두, 건포도나 아몬드 등속의 견과류를 있는 대로 꽉꽉 채워낸 사과 오븐 구이…. 적당히 먹을만하다면 뭐든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심해가 보아도 저절로 침이 고일 만했다. 어느새 그릇을 가져온 아셀라는 오븐에 구운 사과구이를 한 조각 가져와 포크로 작게 잘라 입에 가져간다. 속까지 익은 사과구이는 조금 힘을 준 걸로도 쉽게 으스러져서 안에 있던 견과류가 쏟아지고 진한 시나몬 향이 심해가 있는 곳까지 퍼진다.

 

“엄청 달콤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 달아.”

“맛은?”

“으응, 네가 어제 만들어 준 햄버그가 더 맛있으려나.”

“헛소리….”

“정말이야. 나 못 믿어?”

“널 누가 믿냐.”

 

 너무하다며 우는 소리를 흉내 내지만 처음부터 흉내를 낼 생각조차 없었던 건지, 오히려 그 어설픈 모양새가 화를 부른다. 아셀라의 놀음에 진지에 대응해봤자 저쪽을 재밌게 해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반응한다. 다른 이라면 상대도 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게 심해의 자각하지 못한 부분의 무른 지점이었고, 누구보다도 동행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셀라는 그런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과하지 않는 선에서, 동행인에게는 들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미트파이가 마음에 든 모양인지 한 조각을 더 접시 위로 올리는 심해의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아셀라는 무알코올이라고 적혀있는 칵테일을 집어 들었다. 색에 따라서 맛이 다른 여러 칵테일 중에서도 짙은 남색에 가까운 푸른색을 집어 들었던 것은 옆에 있는 동행인의 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만 과일보다도 시럽의 맛이 짙은 칵테일은 안타깝게도 아셀라의 취향은 아니었기에, 아셀라는 한 모금 마신 것이 전부인 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고, 대신 음악 소리에 파묻힌 불특정 다수의 잡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술집이나 파티 장소가 정보를 수집하기는 가장 최적의 장소로 묘사되고는 하는데, 그 이유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 소문 들었어요?”

“소문이라면 혹시 이 열차의 목적지에 대한 거 말인가요?”

“맞아요, 그거! 그 볼품없는 아이는 아주 대놓고 노리던걸요. 정말 천박해요! 어쩌다가 그런 아이가 이곳에 초대된 걸까요.”

“볼품없는 아이라면…혹시 그 유리구두를 신은 아이?”

“그래요. 구두만큼은 여전히 아름답더군요. 구두를 팔아서 그 볼품없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어떻게 하면 좋았을 건데!”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죠. 그렇지, 마담. 이곳에 아주 훌륭하고 멋진 신사가 있다고 하던데……”

 

 볼품없는 아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귀부인들의 높은 웃음소리는 본 적도 없는 볼품없는 아이보다도 훨씬 천박했다. 해변의 모래처럼 보석을 갈아서 만든 듯 새하얗고 입지가 부드러운 설탕과 아몬드를 낮은 불에 들들 볶아, 오랜 시간을 들여 암석처럼 낮은 층이 만들어진 설탕 결정이 붙은 아몬드를 입에 넣는다. 파삭, 하고 부딪힌 아몬드가 결정과 함께 부서지고 겉에 뿌린 적은 양의 소금이 그저 달기만 한 설탕의 맛을 잡아주면서 아몬드의 고소함과 함께 혀에 감긴다. 이 열차는, 본래라면 도착점 없는 레일을 달린다. 어디까지나 본래의 얘기였으니 이상 현상이 발생한 지금은, 글쎄…. 이 열차의 주인인 아셀라도 소문의 목적지는커녕 지금 이 열차에서 일어난 현상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평소라면 호기심보다 불쾌감이 앞설 것을,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느낌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렇다 할 확신은 없었다. ‘영원의 별’이라는 이름은 지금껏 많은 별을 돌아다녔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크리스마스 열차 파티에 목적지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목적지, 소문…. 여러 가능성이 아셀라의 머리를 어지럽게 돌아다닐 즈음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고개를 돌린다.

 

“…뭐 하고 있어.”

“아, 미안~ 혼자 놔둬서 쓸쓸했지?”

“이제 너한테 반응하기도 지겹다….”

 

 다만 불쾌함이 없다면 당장 신경 쓸 이유도 없다. 아셀라는 금방 생각을 전환 시키고,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둔 후 무표정한 얼굴로 찾아온 동행인에게 능청스럽게 웃는다. 조용해진 아셀라의 모습이 드물어 말 걸은 것에 불과한 심해는 그 능청스러운 태도에 열받는 기분은 들었지만, 화를 내는 것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슬슬 아셀라의 말에 일일이 반응하기가 지쳤다. 물론 쓸데없이 체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다만 심해의 생각과 달리 아셀라는 우스운 태도는 보여도 일회성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아셀라는 다른 이는 몰라도 동행인인 심해를 대할 때면 장난은 쳐도 그 태도도, 말도, 거짓 하나 없이 진지했으니까. 오히려 그런 부분이 진실을 꿰뚫는 심해에게 있어서는 독이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들려오는 밝고 사랑스러운 곡조는 마치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 따스한 정원에서 둘이서 즐겁게 웃으며 춤을 추는 것 같다. 샹들리에의 눈부신 빛무리가 무도회장을 감싸고,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만연한 이곳에서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곡이기도 했다. 분위기를 타는 성격이 아닌 동행인의 손을 깍지를 끼듯 붙잡은 아셀라가 놀란 얼굴을 보고도 마냥 웃으며 춤을 추는 이들 사이로 섞인다. 두 사람의 화려한 옷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춤춰 본 적 없다며….”

“실제로는 없지만, 책으로 읽은 적은 있어.”

“……그러다 발 밟으면 바로 갈 거야.”

 

 길지도 짧지도 않은 공백. 결국 한숨을 내쉬고 어울려주겠다는 듯이 손을 마주 잡는다. 심해는 언제고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조차 성가시고 짜증 난다는 것처럼 제 일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고, 무단으로 그어놓은 선에 침범하고 손을 잡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어렵게 끄덕여준다. 모두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처음을 가져간 자신에게만. 설탕 결정이 층을 이룬 아몬드처럼 달콤한 심해의 무름을 좋아한다. 그 무름이 얼마나 큰 빈틈이 되는지, 빈틈에 침범해 고고한 마음을 물들여 그 정신을 얼마나 무너뜨리고 싶은지.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않은 무심함조차 상대가 누구도 아닌 자신이기에 나오는 무름이라는 걸 안다. “계속 그러다 또 먹힌다?” 누가 누구에게, 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 심해는 능청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노려보며 코웃음 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03.

 한 번도 춰 본 적 없는 춤에 아무리 대단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영화에서 나오는 귀족처럼 잘 추게 되는 건 아니다. 물론 춤을 추는 것도 재능의 영역이 영향을 주는 부분은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어중간한 지식만 있는 반푼이고, 한 사람은 지식조차 없는 초짜다. 모두가 노래의 아름다움을 춤에 담아내고 있는 장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그 치장에 어울리는 귀족이라면 얼른 둘을 샹들리에 아래에서 내쫓으라고 비난할 가능성도 여실하지만, 누구도 둘에게 비난의 손가락을 모으지 않았다.

 

“루이지 보케리나의 현악 5중주곡 E장조 G275의 3악장 미뉴에트.”

“…길어.”

“클래식 곡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빨라진 템포에 맞춰 함께 발을 굴린다. 처음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로 어설프지만, 결코 비난받을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설프지만 아름다운 곡조에 맞추어 리드하는 아셀라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심해는 다소 의심스럽게 정말로 처음인지 물었고, 아셀라는 칭찬 고맙다고 웃었다. 간혹 박자를 한 박자 놓치거나, 서로의 발을 우스꽝스럽게 밟으려고 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아셀라는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하듯 붙잡고 있는 팔을 당겨서 몸을 빙그르르 돌리거나, 새롭게 만든 동작을 넣어 매끄럽게 이어갔다. 어설픈 것을 기지로 무마하니, 완벽하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사랑스럽고 밝은 곡조에 어울리는 움직임이 완성되었다.

 발을 땅에 튕기고 당긴 몸을 끌어안은 듯 원을 그린 아셀라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다. “이 노래 결혼식 곡이래. 우리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 또 헛소리. 어깨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테라스 입구 너머로 보이는 쏟아지는 새하얀 눈. 샹들리에 빛으로 따스하게 물들어 있는 내부와는 눈으로만 보아도 온도 차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새하얗고 눈부신 설원이 펼쳐질까, 아니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중력을 잃어버려 우주의 미아가 될까.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떤 정답이 나올지는 알고 싶다. 심해는 동행인의 헛소리를 말로 받아치는 대신 단단히 붙잡은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압력에 놀라 휘청이는 몸을 바로 잡듯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어느새 꼬여버린 발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듯 땅을 밟는다. 아프지 않게 부딪힌 이마, 섞일 듯이 가까워진 호흡. 놀라서 커진 벚꽃색 눈동자가 이내 서서히 유쾌함으로 물드는 꼴은, 당장 시야를 전부 차지하게 된 심해가 보기에는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웬일이야 적극적이게. 혹시 욕구불만?”

“혀 뽑히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라….”

“아하하, 무서워~”

 

 무서운 기색도 없이 뱉어진 말이 유쾌하기 짝이 없다. 혀를 차는 심해를 눈앞에 두고도 아셀라는 태연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셀라가 말대로 심해의 행동은 드물 게 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맞았다. 그저 성가시다는 이유로 방관자를 자처하는 이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니 아셀라는 그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얼굴을 어떤 의미로든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능청스러운 태도도, 놀리는 듯한 말투도, 화를 부르는 얄미움도. 전부 본래 성격도 있었지만, 결국 제 동행인의 전부를 보고 싶다는 음습한 욕망이 근원 된다.

 아셀라는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높게 올리고 뒤로 휘어진 허리를 바로 세운다. 닿을 듯이 가까워진 입술은 그 온도가 닿아 섞이기 직전, 사선을 그리며 섞인 다리 사이로 제 발을 억지로 집어넣어 상대의 신체를 뒤로 넘어뜨리는 것으로 거리를 잡는다. 넘어질 듯 뒤로 쓰러진 몸을 붙잡듯 이번에는 아셀라의 팔이 반대로 심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싼다. 순식간에 반대가 되어버린 자세. 여전히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온도.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커진 눈은 평소에는 눈꺼풀이 감겨 잘 보이지 않았던 곳 전부를 구석구석 보여준다. 네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 그런 말을 했었을 때 심해가 무슨 얼굴을 했더라.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고 마주한 시선에 둥글게 눈가를 휜다.

 

“지금은 어때?”

“…욕구불만은 내가 아니라 너 인 것 같다.”

“으응, 그럴지도. 그 얼굴 꼴리잖아.”

“제발 단어 좀 골라.”

“좋아, 그럼 객실 갈까?”

“내가 고르라고 했다….”

 

 서로의 발끝이 툭 부딪히면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마침표를 찍는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춤을 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짧은 박수가 들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음악은 직전 곡보다도 조금 더 강렬하고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이번에는 사랑과 정열의 곡이네. 한 곡 더 추고 갈래?” 허리를 감싼 팔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손가락 끝이 등골을 쓰다듬듯 아래에서 위로 세로선을 그린다. 속박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옴싹달싹한 감각에 그만 미간을 찌푸린 심해는 이번에는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선택지 대신 입을 열었다. “가자며, 객실.” 뒤에서 누군가 어머, 하고 짧은 감탄사를 보낸 것 같다.

 

 


 

 

04.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암흑의 점 속에는 때때로 외로운 사람이 사는 별이 있다고 한다. 추억과 슬픔이 후회와 함께 조그만 덩어리가 되어 죽은 듯이 암흑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그런 별이라고.

 

***

 

  

 파티를 시작하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열차 내부는 떠들썩하다. 오히려 분위기가 무르익어 알코올에 취한 듯 독한 냄새를 풍기며 상기된 목소리로 떠들고 있는 이들이 늘었다. 알코올을 선호하지 않는 두 사람은 풍겨오는 술 냄새에 “주정뱅이 파티.” 같은 짧은 감상을 남긴다. 사실상 술잔을 나누는 파티 자리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객실로 향하는 길, 지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귀부인들의 합석 제안을 몇 번이고 정중히 거절한다. 함께 술을 마시자느니, 대화를 나누자느니, 객실은 어떠냐느니…. 그중에는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하자는 수상한 제안도 여럿 있었다. 원래도 다른 사람보다 특출난 외모가 화려한 치장으로 더 눈에 띄게 되면서 관심을 받는 빈도가 늘어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들 우리한테 관심이 많나 봐.” 즐거운 듯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결코 관심을 받고 생긴 즐거움은 아니었다. 제안이 늘어날수록 붙잡고 있는 서로의 손에서 마찰이 강해진다. 이곳이 영원한 겨울의 섬이 아니었다면 맞닿은 손바닥에서 축축한 땀방울이 서렸을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객차를 지나 네 번째 객차로, 네 번째 객차를 지나 세 번째 객차로. 숫자가 낮아질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세 번째 식당 칸을 지나서 두 번째 객차로 들어오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는다. 무도회장이나 식당, 테라스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그런지 객실이 준비되어있는 두 번째 객차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바깥소리가 안으로 새는 것에 반해서, 안쪽 소리가 바깥으로 새는 일은 없는 건지 문이 잠겨있는 다른 객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없었다. “눈 아직도 많이 내린다.” 객실의 문을 열기 위해 꺼낸 황금색의 열쇠가 조명을 받아 빛난다. 창밖에서는 눈앞이 새하얘질 만큼 폭설이 쏟아지고 있어서 하늘이 까만지 파란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실 눈이 내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전부가 아셀라의 영역 안이었기에, 이 열차는 설령 봄꽃이 가득 핀 역에 도착해도 겨울처럼 추웠다. 그러니 열차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드문 풍경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뒤덮일 것처럼 내려오는 폭설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이네.” 눈부신 아침 해가 고개를 들이밀어 영원한 밤의 장막을 찢어낸 날, 사용하지 않은 도화지처럼 새하얀 세상에 아름다운 황혼이 물들었다. 온 세상을 하얗게 칠하던 눈보라가 멈추었던 날 이후로 이 세상에는 단 한 번의 폭설조차 내린 적 없다. 갑작스러운 이변,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설산에 갇히기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녹지 않은 얼음처럼 차갑고, 심해의 밑바닥에 있는 바닷물처럼 시린 두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열기가 울렁거린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맞닿은 손끝에서 일어난 마찰, 온도의 변화. 춥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덥다고는 할 수 없는 열차의 공기가 조금씩 열이 오를 즈음 그게 공기가 변한 게 아니라 서로의 체온이 올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셔츠의 윗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낸다. 달칵하고 열쇠 구멍에 꽂힌 열쇠가 반 바퀴 돌아가 잠금을 풀어내려고 하던 찰나, 복도 멀리에서 구두 굽이 다급하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몇 번이고 울리더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잿빛의 천 자락이 흩날렸다.

 흩날린 천 자락은 바닥에 침몰한다. 아셀라는 어깨에서 느껴진 미세한 통증에 미간 하나 찌푸리는 것 없이 어정쩡하게 열어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대신 자신에게 달려오더니 부딪힌 이를 내려다보았다. 흩날리는 잿빛의 드레스는 이곳에 보았던 어떤 옷보다도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볼품없는 모습을 가려주듯 영롱한 빛을 가진 투명한 공예품이 시선을 강탈한다. 적어도 아셀라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든다면 저 투명한 유리구두를 단연코 먼저 꼽을 수 있었다. 고작 한순간 보았던 것이 전부임에도 그런 말을 확신 들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공예품이었다. 그건,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빚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빼앗긴 시선이 영롱함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못처럼 박히고, 두 사람이 만든 세계에 돌연 침입한 유리구두의 주인이 공처럼 튀어 올라 침묵을 깨뜨린다.

 

“여러분 혹시 왕자님을 보지 못하셨나요…!?”

“왕자님…?”

 

  

 유리구두의 주인은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조잡한 움직임으로 보잘것없는 잿빛 드레스 자락을 흔든다. 아셀라는 고개를 기울였고, 심해는 고개를 젓는다. 왕자님이라니? 동화 속에라도 나오는 것만 같은 단어다. 하지만 이곳은 동화가 아니었고, 그저 귀족들이 모여 파티를 열고 있는 조금 고급스러운 열차일 뿐이다. 왕자가 누굴 말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열차 안에서 고작 왕자라는 단어로 인물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아셀라는 다친 곳은 없느냐는 예의상 질문을 던진 후에야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유리구두의 주인은 고맙다는 말을 던지듯 외치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아아, 왕자님…! 저와 영원을 약속하셨잖아요…!” 구두 굽이 다급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멀어지고,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객차 내부에서 두 번째 침묵이 감돈다. 열차가 작게 흔들리고 복도에 달린 전등이 깜빡, 하고 눈꺼풀을 움직였다.

 

“바빠 보이는 사람이네~ 왕자님이 누굴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동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되나 보지.”

“하지만 왕자님과 행복해진 신데렐라가 왕자를 찾으면서 다닌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차이기라도 했다던가….”

“아하하, 그건 안타깝다! 왕자님한테 영원은 너무 무거웠던 걸지도 몰라. 왕자님은 그저 유리구두를 찾아 주었을 뿐이잖아.”

 

 재를 뒤집어쓴 소녀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마저 객실의 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유리구두의 주인은 유리구두에 빌붙어 뒤집어쓴 재를 씻어내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얻게 된 영광, 동화처럼 빠진 첫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런데 영원이라는 건 결국 뭘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인 건 중앙에 있는 창문으로 보이는, 눈이 몰아치는 풍경이다. 문이 닫히고 작은 소음조차 멀어진다.

 

 달칵.

 

 안쪽에서 객실의 문이 잠긴다. 몰아치는 하얀 눈은 시야를 흐릴 정도로 난폭했지만, 두 사람을 가려줄 정도로 상냥하지 않았다. 나누어 낀 색이 다른 장갑이 창밖의 풍경처럼 섞인다. 하늘조차 가린 검은 먹구름, 시야를 어지럽히는 새하얀 눈더미. 심해는 어느새 기울어진 몸이 좌석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넘어진 몸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아셀라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할 때 예고도 없이 뒤에서 끌어안는 것도, 시선을 마주하면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는 것도, 붙잡은 손을 마주 잡는 것도, 갑자기 넘어뜨리고 그 위로 올라타는 일도. 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음 만난 날부터 변하지 않았다. 올려다본 천장에 시야가 닿는다.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따스한 주홍빛의 전등이 암적색의 천장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을 가리듯 상체를 내밀은 아셀라가 호기심 채운 시선을 내렸다. 숨이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마가 닿지도 않았고. 하지만 손가락을 얽듯 마주 잡은 손만은 서로를 옥죄듯 무겁게 짓눌렀다.

 

“너는 어때? 나랑 영원히 사는 거 말이야.”

“…싫다고 말해도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잘도 묻는군.”

“그거야 나, 직접 입으로 듣는 거 좋아하니까. 심해도 알잖아?”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질량, 무게, 크기. 마치 심장을 꿰뚫어 보듯 서로의 전부를 알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매번 질리지도 않고 사랑에 대한 질답을 나누었다. 어떤 질문에서 고개를 끄덕일지, 어떤 질문에서 고민할지, 어떤 질문에도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듯, 말로 증명하라는 듯.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이란 이름의 신뢰를 증명한다. 사실 두 사람에게는 증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가 두텁고, 불안이란 요소를 끌어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질릴 정도로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아마도 얼어버릴 정도로 추운 세계에서 온도를 확인하기 위함이리라.

 열량이 함유된 무거운 침묵. 눈보라가 불어오는 창밖은 그칠 기미도 없이 온 세상을 희게 물든다. “…장갑, 갑갑하다.” 심해가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유리구두의 주인이 애타게 찾아다니는 왕자님처럼 영원이란 무게에 짓눌린 도망자도, 하물며 영원이란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간이도 아니다. 그럼, 왜. “그럼 벗자.” 아셀라는 이유를 추궁하기를 그만두는 대신 얽히듯 마주 잡은 손을 끌어와 눈처럼 하얀 장갑 끝을 이빨로 물었다. 혹여 감싼 손가락 다치진 않을까 조심스럽고, 동시에 금욕적일 정도로 감싼 이를 욕망하는 것만 같은 무자비함이었다. 사이에 낀 장갑의 손가락 끝은 아셀라가 고개를 뒤로 움직일 때면 천천히 벗겨져, 두꺼운 장갑에 숨겨져 있던 창백한 손을 드러낸다. 시릴 정도로 창백한 손가락은 따뜻한 주홍빛 전등 아래에 있음에도 묘하게 푸른 빛을 보인다. 장갑이 중간 즈음 벗겨졌을 때, 심해의 손가락이 움찔 떨린다.

 

“…간지러워.”

“그래?”

 

 푸른 빛이 도는 창백한 손과 대칭되는 짙은 검은색의 장갑. 반 정도 벗겨진 장갑은 맞닿지 않은 손바닥 사이로 조그만 공간이 생기고, 아셀라는 주저 없이 입을 떼고 공간 사이로 장갑 벗은 제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다. 차가움과 차가움이 부딪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몸이 놀란 듯 가늘게 떨렸지만, 아셀라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손바닥 사이로 비집어 넣은 손가락을 조금 더, 조금 더…그렇게 안쪽으로 밀어, 기어코 밀려 올라간 색이 다른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맞닿았던 차가운 온도가 조금씩, 정말로 조금씩 열을 오른다. 부딪힌 손가락이, 얽힌 손끝이, 눈보라 부는 풍경 비치는 객실이,

 

똑똑.

 

 찬물을 부은 듯 멈추었던 시간이 흐르고, 둘 뿐이었던 세계가 다시 움직인다. 입술이 닿을 듯 부딪히기 직전에 멈춘 거리에서 두 사람은 느리게 호흡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건조한 피부에 눅눅한 숨결이 닿는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마주한 색이 다른 눈동자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면,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완전히 서로에게 빠지려는 순간 눈치도 없이 난입한 이가 흙 묻은 발로 선 위를 밟는다. 말 하나 건네지 않고 시선만을 교환한다.

 먼저 행동한 건 심해다. 심해는 못 들은 척 무시하기 위해 눈을 감았고, 아셀라는 그 의지를 읽어 눈꺼풀 위로 아프지 않게 입술을 누른다. 서로 다를 거 없는 차가운 온도가 녹아들고,

 

 똑똑.

 

 다시 한번 숨결이 섞인다.

 

 똑똑.

 

 닫힌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면 가늘게 뜬 시선 사이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능청스럽게 웃는 얼굴이 보였고,

 

 똑똑.

 

 평소와 같은 시야임에도 색다른 옷을 입어서 그런지,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상황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조금 더 열이 오른 듯한 얼굴이 보인다.

 

 똑똑.

 

 아셀라는 이 순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좋아했다.

 

 똑똑.

 

 느린 것 같으면서 급작스럽게 빨라지고,

 

 똑똑.

 

 사랑에 빠진 듯 설레면서도,

 

 똑똑.

  

 익숙함이라는 감정에서 오는 간질거림.

 

 똑똑.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지만

 

 똑똑.

  

 열기에 뇌가 녹아버릴 것처럼 뜨겁고,

 

 

 똑똑.

 

 무더운,

 

똑똑똑

똑똑

똑,

 

“저거 죽일까….”

“도와줄까?”

 

 문 못 열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객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똑같은 음정으로 반복되다가 마지막으로 가서 간격이고 규칙이고 무시하고 무작정 문을 두들긴다. 사전에 포기한다는 말이 없는 사람처럼 지겨울 정도로 성질을 긁으니, 결국 먼저 깃발을 든 것은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쉽게 열어줄 문이었지만, 지금은 기껏 분위기 좋게 잡은 타이밍이었으니까. 분위기고 산통이 전부 깨져버린 두 사람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동시에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둘 뿐인 공간, 조용히 세상을 뒤덮는 새하얀 눈, 은은한 조명, 특별한 날. 갖출 것은 전부 갖추었음에도 오늘은 그래, 날이 아니다.

 아셀라가 몸을 일으키는 것에 따라서 심해도 따라서 몸을 일으키면 좌석 하나에 몸을 겹치 듯 누워 있던 두 사람은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정리했다. 떨어진 모자를 다시 쓰고, 삐뚤어진 타이를 바로 잡고, 구겨진 천을 피고, 풀린 단추를 다시 채우고…. 그 와중에도 객실 바깥에서는 똑똑, 똑똑. 하고 다시 같은 간격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그렇게 말하지는 말고. 문을 못 열어서 죽었던 귀신일지도 모르잖아. 불쌍한 사람은 도와줘야지.”

“네가 제일 너무해….”

 

 아셀라는 대답하는 대신 뻔뻔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릴 타이밍에 잠금을 풀고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소리가 울리면서 닫아두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서야 지겹게 울리던 소리가 그제야 멎을 수 있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기분이 나빠 보이는 심해를 두고, 아셀라는 문 못 열어서 죽었던 귀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둥그렇게 뜬다. 탁, 하고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힌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목적지까지 합석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이거 귀신이 아니라 멋진 신사님이었네요.”

 

 

 새까만 정장을 맵시 있게 입은 중절모의 신사는 절로 감탄 나올 정도로 멋지게 허리를 숙인다. 열차 안의 다른 승객과 똑같이, 귀신처럼 천 자락만 흔들림에도 멋지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품격이다. 인사를 위해 벗었던 중절모를 다시 뒤집어쓴 신사는 미안하다는 듯,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색한 얼굴로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있는 객실이 이곳 밖에는 없는 것 같아서 마음에 급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중요한 순간을 방해해서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워질 정도로 정중한 태도다. 다소 기분이 상한 것은 맞지만 화를 낼 정도는 아니다. 아셀라의 시선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심해에게 닿으면, 심해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느리게, 아주 느리게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그럼 이쪽으로 앉아주세요~저는 이쪽에 앉을게요. 아, 이 친구는 원래 말수가 적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사실은 엄청 다정한 친구이지만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사실이잖아?”

“시끄러워.”

 

 심해가 불만스럽게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옆자리에 앉은 아셀라는 평소라면 조금 더 건들며 놀았겠지만,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한 후 맞은편에 자리 잡은 신사를 보았다. 버릇인 듯 고급스러운 검은색 지팡이로 바닥을 탁, 하고 친 신사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벽에 세워둔다. 기분은 상했으나 그보다 신사가 했던 말에서 의문점을 해결하고자 호기심 앞선 입이 열린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동행인과의 시간은 언제고 다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객실이 이곳밖에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객실이 전부 꽉 차 있더군요. 유일하게 이 객실만이 인원이 비어 있었습니다. 아직 오래 서 있는다고 지칠 정도로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열차는 자리가 없으면 쫓겨나니까요.”

“하지만 객실이 없더라도 식당이나 무도회장 같은 다른 공간도 있잖아요.”

“이런, 다른 객차는 이미 불이 꺼졌습니다. 지금은 오직 좌석이 있는 객차만이 남았죠.”

 

 그건 마치 이제 다른 객차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객실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조용했다. 다들 무도회장이나 식당이 있는 객차에 몰려서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런데 고작 그런 짧은 시간에 사람들이 객실로 모두 들어가, 그 화려하던 무도회장이 정리되었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사의 말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고,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다. 이 파티 자체가 이상 현상이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럼 어쩔 수 없었네요.” 놀라거나 의문을 보이기보다 아셀라는 자연스럽게 긍정했다.

 객실 안에 있는 셋은 서로에게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았다. 그런 세계였다. 이름이라는 고유 명사가 존재하는 이는 손에 꼽았고, 먼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신사는 이 세계에 있어서 그런 존재라는 것이니까. “여러분은 어쩌다가 이 열차에 타게 되셨나요?” 신사는 처음에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인자한 노인의 목소리로 물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질릴 정도로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운이 좋았죠. 당신은요?”

“이 열차를 타고 싶어서 고생 꽤 했죠. 열차를 탄 모두가 그러겠지만…다들 영원한 생명을 찾아 이 우주를 돌아다니던 이들이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영원의 생명…. 그러고 보니 당신은 목적지에 대해 알고 있나요? 저희는 안타깝게도 영원의 생명을 위해 이곳에 탄 건 아니라서요.”

“그건 드물군요. 그럼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말했던 것처럼 운이 좋았죠. 이 열차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저희에게 목적지는 없어요. 그저 나아갈 수 있는 곳을, 목적지 없이 끝까지 달리고 있을 뿐이죠.”

 

 그럼 분명, 저희는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신사는 대답하는 대신 얼굴 없는 얼굴로 인자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뻗은 아셀라의 손끝이 심해와 닿는다. 드물게 먼저 손을 잡아준 것은 심해다. 닿은 온도를 확인하기도 전에 체온에 녹을 것처럼 손을 얽혀 붙잡은 서로의 손. 신사는 마치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처럼 느긋한 목소리를 잇는다.

 

“당신들에게 있어서 영원은 무엇입니까?”

“으음…철학적인 얘기네요. 저에게 있어서 영원은 역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걸 의미할까요…. 심해는 어때-?”

“……죽음.”

“응? 죽음은 끝나는 거잖아?”

“…죽음은 끝이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니까.”

 

 영원,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는 추상적 개념. 신사는 어느 쪽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객실에 들어와 처음으로 제 말에 대답해준 심해에게 감사함의 의미로 중절모를 벗어 가볍게, 하지만 최대한의 예를 표해 인사를 전했다. 심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창밖에 두던 시선을 그제야 신사에게 돌렸다. 드디어 이 얘기에 참여할 의사를 밝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각자 다른 해석 하겠지만, 두 분이 하신 말씀처럼 영원이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도, 그리고 이 열차에 탄 다른 승객도 영원을 찾아 헤맨 끝에 이 열차에 탄 것이고요.”

“으음, 그럼 당신의 영원은 뭔가요? 그건 다른 승객들에게도 같은 영원을 의미하나요? 저도 영원에는 꽤 흥미가 있어서요.”

“네, 저희는 모두 같은 의미의 영원을 찾아 헤맨 끝에 모인 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 영원은 당신이 바라는 이상과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신사의 고개가 움직였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심해에게 닿았다는 것은 아셀라조차 알 수 있었다. “저희가 바라는 영원은 당신이 낸 해답이에요.” 아셀라는 죽음이 영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메리에게 있어서 안식은 죽음이었고, 죽음은 이 현실에서 숨을 거두고 영원히 잠드는 끝을 의미했으니까. 오직 죽음이란 안식을 바랐던 마린이었기에, 심해는 죽음과 영원을 묶을 수 있었던 걸까. 겹친 손을 힘을 주어서 붙잡는다. 상대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 불안은 없었다. 마찰이 일어나 미적지근하게 변한 그 온도가 좋아서 힘을 주었을 뿐이다. 신사는 벗은 모자를 무릎 위로 올려두고 창밖을 보았고, 두 사람도 따라서 창밖을 보았다.

 

“지금 이 열차가 향하는 곳은 모든 이야기의 마침표이자, 모든 죽음이 모이는 무덤입니다. 누군가는 그곳을 중력의 무덤이라고도 부르더군요. 저는 영원의 별이란 표현보다도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창밖에서는 눈이 쏟아진 게 거짓말처럼 무수한 은하가 펼쳐지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두 사람은 언제고 레일도 없이 우주를 달리는 열차에서 다음 역이 어딘지도 모르는 목적지 없는 여행을 했다. 객실이란 구분조차 없는 낡은 열차에서 무수하게 빈 좌석 중에 단 하나의 좌석만을 차지한 채로 말이다. 아직 종은 치지 않았다. 그러니 크리스마스도, 이 열차 파티도 끝나지 않았지만, 마치 곧 다가올 마지막을 예고하듯 내다본 창밖, 저 앞에서, 아주 커다란 검은색 구멍이 보였다. 모든 걸 빨아들여서 0으로 만들 암흑의 점.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암흑의 점이, 신사가 말하는 영원의 별이자 중력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블랙홀을 눈앞에 두고 일순 압도 된 두 사람과 달리, 신사는 느긋하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는 듯 벗었던 중절모를 다시 쓰고, 세워두었던 검은색 지팡이를 든다.

 

“전 끝나지 않는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요. 죽음이란,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은 이후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걸 말합니다. 가지고 있던 마음조차, 마침표를 찍은 시점에서 영원히 이어지죠. 변하지 않는 사랑, 변하지 않은 우정, 변하지 않은 결말.”

“마침표를 찍지 않아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도 있을지도 몰라요.”

“없다고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거죠.”

 

 마음이란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 변해버린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 영원을 찾는다. 마치 유리구두의 주인이 자신의 왕자님과 맺은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셀라도, 심해도, 신사가 무엇을 바라는지 묻지 않았다. “다음 역은 영원의 별…” 열차를 울리는 안내방송을 듣고 신사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인사를 했을 때처럼, 품격 하나 잃지 않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당신들이 나아갈 여행길에 축복이 있기를 바랄게요.” 신사는 객실을 나갔다. 안내방송을 제외하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사의 멋들어진 구두 굽 소리조차도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실의 문이 열리고 처음에 보았던 얼굴이 모자로 가려진 승무원이 찾아왔다. 열차의 탑승객들과 달리 천 자락만 펄럭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두 분은 내리지 않을 건가요?”

“저희는 이곳에 목적지가 아니라서요.”

 

 

 승무원은 확인했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객실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는 출발한다. 승무원은 다음 역이 어디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안내방송조차도 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거야 두 사람에게는 도착지는 있어도 목적지는 없었으니까. 나아갈 길은 있어도, 정착할 장소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주 예전에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는, 읽지 못하는, 써 내려가지 못할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으니까.

 

 깜빡.

 두 사람이 동시에 눈꺼풀을 깜빡이자 거기에는 더 이상 고급스러운 열차의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조명도, 수놓은 금박도, 떠들썩한 소리도 없다. 푹신하지 않은 자주색 원단의 딱딱한 의자 수십 개가 마주 보는 형태로 늘어져 있고, 물건도 분위기도 어딘가 낡은 듯 녹슬어있다. 불을 밝혀주는 눈부신 별 모양의 오브젝트가 모빌처럼 흔들리는 것이 전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겨울밤의 환상처럼 눈 녹듯이 사라진 풍경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갈아입은 옷도 주머니에 넣어둔 티켓도 추억처럼 남아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그만 웃음을 흘렸다. 눈은 아주 예전에 그쳐서 창밖에는 은하의 풍경만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종소리가 울린다.

 

“메리 크리스마스, 심해.”

“…늦었어, 멍청아.”

 

 한 겨울밤의 꿈처럼 끝나버린 환상.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파티. 두 사람은 분명, 언젠가 반드시 끝나버릴 이 여행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심해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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